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412. 하이 웨이스트라인

서 량 2022. 4. 5. 17:17

 

2020년 말 방영된 영국 시대드라마 브리저튼(Bridgerton)을 주말에 한꺼번에 몰아쳐 보았다. 넷플릭스 시청률 1위. 청소년관람불가. 킹 조지 3세의 정신병으로 아들 조지 4세의 섭정(攝政)이 시작된지 이태 후인 1813년. 영국은 조지 3세의 부인 샬럿 여왕이 실세다. 

 

정갈한 런던 거리가 잠시 비춰진 후 페더링튼 남작(男爵) 부인의 하녀가 세 딸 중 첫딸의 코르셋을 심하게 졸라매는 첫 장면이 충격적이다. 혈색 좋은 귀족 신랑감들이 우글거리는 무도회에 딸들을 출품하는 준비작업.

 

80대 중반을 넘은 줄리 앤드루스의 내레이션이 감미롭게 울린다. – “천박하고 요령부득인 어미에 의하여 서글픈 암퇘지처럼 결혼시장에 팔려가는 세 처녀…”

 

브리저튼 자작(子爵)의 첫딸 대프니가 샬럿 여왕으로부터 사교계 시즌 최고의 미인이라는 극찬을 받는다. 여왕의 의견이 곧 여론이다. 남왕(男王)이건 여왕이건 동서고금의 왕은 모든 여론의 시발점이기도 한 것을.

 

대프니는 이내 사교계의 여왕이 된다. 사납고 섹시한 헤이스팅스 공작(公爵)이 등장한다. 런던 상류사회 스캔들의 의혹과 예측과 비밀이 펼쳐진다. 브리저튼 가(家) 4남 4녀의 애정관계가 각광의 중심이다.

 

귀족들에게 뉴스레터가 배부된다. 상류사회 스캔들의 재미가 보통 재미가 아니지. 발행인 ‘Lady Whistledown’에게 막강한 관심과 호기심이 쏠린다. 휘슬다운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뉴스레터의 위력이 여왕의 식견을 능가한다. 여론몰이의 대가는 단연 휘슬다운 부인이다. 요즘 여론몰이와의 차이점은 가짜뉴스가 전혀 없다는 점.

 

귀족들의 대화는 투박한 구어(口語)가 아닌 세련된 문어(文語)의 과장법이 예사로운 긴 문장의 연속이다. 짧은 구어체를 처음 문학에 도입한 헤밍웨이가 어안이 벙벙해질 만큼 유려한 언술에 관객은 혼이 쑥 빠진다. 영국식 억양의 젠체하는 분위기에 미국적 거부감이 솟더라도.

 

사전은 ‘젠체하다’를 ‘잘난 체하다’로 풀이하면서 유의어로 ‘거드럭거리다, 으스대다’를 손꼽는다. 1904년 대한매일신보 기사에, “각 대관이 회집하여 제가 젠 체하느라고 허튼 수작을 골라서 할 적에”라는 표현이 처음 나왔고 1938년 ‘조선어사전’에 ‘젠체하다’가 올랐다.

 

1961년 이희승의 국어사전에 ‘재다’를 ‘잘난 척하고 으스대다’로 풀이한 것을 보면 젠체하다는 길이를 잰 척한다는 뜻. ‘잰’이 ‘젠’으로 변했다. ‘체하다’와 동의어인 ‘척하다’의 ‘척’은 우리 옛날 길이 단위, 척(尺)이다. 길이를 평가하는 척하는 사람이 평가를 받는 사람 위에 올라선다. ‘폼을 잰다’는 표현도 으스대는 투의 말이다.

 

‘체하다’, ‘척하다’를 사전은 ‘앞말이 뜻하는 행동이나 상태를 거짓으로 그럴듯하게 꾸밈을 나타내는 말’이라 풀이한다. 복수(複數)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집단적으로 젠체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거짓된 행동은 때로 허황되고 미치광스럽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절규한다. – "한 개인이 미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러나 그룹과 정당(政黨)과 국가와 시대사조가 미치는 일은 당연지사다.”

 

19세기 초 영국 섭정시대에 간(肝)이 상하도록 코르셋을 조여 매는 패션과 웨이스트라인을 높게 잡아서 치마 길이가 아주 길어지는 패션이 동시에 공존했다는 기록이 흥미롭다. 하체가 길어 보이는 비주얼 이펙트를 십분 활용하여 영국여자들이 성적(性的)으로 폼을 쟀던 것이다. 가부장적 기존체제에 도전장을 던지는 시대사조를 야기시켰다는 말이다.

 

© 서 량 2022.04.03

-- 뉴욕 중앙일보 2022년 4월 6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22/04/05/society/opinion/202204051719187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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