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ve two watches. I always have two. One is on my wrist and the other one is in my head. It’s always been that way. - 나는 시계가 둘이야. 늘 둘이 있어. 하나는 손목에 하나는 머리 속에 있지. 항상 그래 왔어.”
2021년 2월에 개봉된 앤서니 홉킨스 주연 ‘The Father’에 나오는 앤서니가 하는 말이다. 왠지 애처롭다는 느낌이 엄습한다. 실재하는 손목시계와 머리 속에서 망가지고 있는 시간개념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치매환자의 극중 이름도 앤서니다.
한국에서도 4월 초에 개봉된 영화다. 고심 끝에 타이틀을 ‘아버지’라 번역하지 않고 그냥 ‘더 파더’라 옮긴 것이 흥미롭다. 84살의 앤서니 홉킨스의 소스라치게 강도 높은 열연이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을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앤서니는 치매증상이 심각하다. 그는 이혼 5년차에 좋은 프랑스 남자를 만나 아버지를 버리고 파리로 떠난 딸, 앤과 환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대화한다. 영화는 환상과 현실을 교묘하게 뒤범벅해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내가 치매에 걸렸나?
황당한 스토리 진행에 끌려다니는 동안 영화는 어느덧 끝부분에 도달한다. 그때서야 당신은 아, 내가 봤던 것들이 그의 환상이었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쉰다. 꿈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깨어나는 기분으로.
앤서니는 손목시계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신의 두뇌기능이 부실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간병인이 시계를 훔쳤다는 망상에 빠진다. 손목시계에 대한 집념이 대단하다. 사위와 대화하는 상상 속 장면에서 사위의 시계가 참 좋다면서 선물로 받았느냐 아니면 샀냐고 물어본다. 샀다고 하자 영수증이 있냐고 따진다. 그의 시계에 대한 지독한 관심은 삶의 남은 시간에 대한 뼈저린 집착이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시계를 ‘clock’이라 하고 회중시계, 손목시계 같은 사적(private)인 시계를 ‘watch’라 한다. ‘clock’는 고대 불어와 라틴어에서 종(bell)을 뜻했다. 교회의 종소리는 동네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정보제공이었고 뻐꾸기 시계는 식구들의 일상을 종용하는 소식통이었다.
‘watch’는 전인도 유럽어로 강하고 활발하다는 의미였는데 13세기에 불침번 또는 야간순찰이라는 뜻으로 변했다. 손목시계, 'wristwatch'라는 단어가 통용된 시기는 19세기 초. 인간은 진화하면 할수록 점점 더 'private'한 존재로 변천하는 것 같다. 사회주의의 반대 개념, 개인주의의 창궐이다.
시계는 물질명사. 시간은 추상명사다. 시계는 손으로 만질 수 있지만, 시간은 때 時, 사이 間, 즉 때와 때 사이에 끼어 있는 추상적 공간이다. 시계가 유물론자의 패물이라면 시간은 유심론자의 철학이론이다. 전자는 어린이 사고방식, 후자는 어른들의 숙제다.
앤서니는 시간관념이 붕괴되는 자신의 정신상태를 본능적으로 감지하면서 손목시계가 하나 더 머리 속에 있었으면 하는 상념에 빠져 있다. 시계가 둘이면 얼마나 마음이 든든할까. 자동차 스페어 키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이.
“나는 시계가 셋이야. 늘 셋이 있어. 하나는 손목에, 하나는 머리 속에, 또 하나는 영혼 속에. 항상 그래 왔어.” 내 신체를 떠난 어느 아늑한 처소에서 조용히 작동하는 포근한 시계 품을 그리워하면서 불현듯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서 량 2021.04.18
-- 뉴욕 중앙일보 2021년 4월 21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9283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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