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 서울의대 23회 졸업 50주년 기념여행을 마치고
동대문에서 서울의대 쪽으로 걸어간다. 옛날에 잽싸게 걸어서 15분 정도 걸렸으니까 지금도 그러려니 했지. 횡단보도 신호등마다 매번 저지당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대부분의 지연현상은 횡단보도 때문이다. 의대 정문 도착까지 40분도 더 걸렸다.
나는 왜 과거에 매달리는가? 이번 졸업 50주년 기념여행은 과거를 재확인해 보고 싶은 속셈이었고, 색소폰 축하연주를 해줄 친척 결혼식도 있었다. 10월 2째 주 함춘문예회 시화전에 곁들여진 뉴저지 출신 의사시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대한 좌담회 예정도 무시 못한다. 어쨌든 그날 옛날 교정을 혼자 가보고 싶은 충동을 나는 이기지 못했다.
옛날 서울의대 수위실의 ‘엄씨’라는 분이 생각났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나타날 제1강의실과 반대쪽 제2강의실을 찾아 헤매다가 포기하고 병원 쪽으로 가는 언덕길에 오른다. 시계탑 앞 벤치에 앉아 쉬다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사정이 있어 모교방문과 남산 투어에 참가하지 못했다. 늘 면밀주도한 동기회장 김원동이 이메일을 보내줬다. 말 몇 마디를 고쳐서 그 전문을 여기에 싣는다. 김원동은 감성을 배제하고 드라이한 분위기를 풍길 때 아주 쿨하다.
-- 10월 14일, 월요일아침, 서울의대 제공버스로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서울의대 본관에 도착. 현대식으로 단장된 3층 강당에서 23회 졸업 50주년 모교 방문 기념식이 있었다. 신찬수 학장, 정승용 서울대학병원 부원장, 이나미 동창회 부원장의 인사말 후에 본인이 동기를 대표하여, “저희가 50년 전 모교에서 배운 의학 및 의술로서 긴 시간을 국내외에서 성공적으로 의료를 시행하며 사회에 기여할 수 있었음이 모교로부터 받은 큰 혜택이라고 생각한다”는 취지를 전했다. 우리들이 모은 서울의대 도서관 건립기금 2500만 원을 본인이 신찬수학장에게, 김중권 동기가 이나미 동창회 부회장에게 동창회 발전기금 일천만 원을 전달했다.
본관 앞과 지금은 없는 해부학 실습실 앞 큰 나무와 병원 시계탑 앞에서 기념촬영이 있었다. 의학박물관을 방문 중 옛날 강의실이 남아있지 않아서 동기들은 아쉬워했다. 병원 투어에서는 전에 없던 레스토랑 등, 신설된 환자 편의시설이 눈에 띄었고, 의생명연구원 11층 가든 뷰 식당에서 창 밖의 창경원을 바라보며 오찬을 마쳤다. 그리고 남산 한옥마을을 거처 남산 정상에 올라 서울 시내를 조망하고 일부는 남산타워에 올라 많이 발전하고 달라진 서울시내를 감상했다. --
같은 날 저녁, 기념만찬이 열리는 롯데호텔 37층이다. 장내가 떠들썩하다. 사회를 맡은 김건상이 똘똘하고 정갈한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더러는 졸업 후 처음 만난 것 같다. 평생을 묵묵하게 지낸 듯한 최윤식이며, 잡은 손을 놓기 힘드는 김태운이 그러했고, 악수도 제대로 하지 못한 최황, 윤경선, 박찬일, 심윤상이 또한 그랬다. 서만길 형, 황정수, 이종성, 송인경, 엄융의, 염광원, 최강원, 조맹기도 마찬가지. 나중에 합세한 박장부는 인물과 키가 아비를 능가하는 아들을 대동했다. 엄대용 형, 심영수, 이양우, 오선웅, 이도영, 김유영은 수년인지 수 십년 전쯤에 한 두 번 만난 기억이 뚜렷하건만. 허기사 요즘 10년 20년은 세월도 아니다. 박건영과 신현정은 여행 중에 다시 사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102명 중 먼저 세상을 떠난 16명의 동기들에게 안부를 묻듯 고개 숙여 묵념을 했다.
안병일이 그 전날 귓속 달팽이관에 돌발적으로 이상이 생겨서 몸을 가누지 못했는데 김종화 아들이 기적처럼 고쳐줬다는 뉴스가 있었다. 오경균 형이 옛날에 뉴욕에서 텍사스로 떠날 때 자신이 불던 클라리넷을 내게 줬던 기억을 되살려 언급한다.
동기들 앞에서 혜은이의 ‘당신만을 사랑해’를 색소폰으로 연주한다. 곡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훈아 노래로 해라”하며 신영수와 차창용이 소리친다. 이들의 목청과 언변에는 도무지 막힘이 없어요. 윤효윤이 좋은 즉흥연설은 준비하는데 3주 이상이 걸린다는 마크 트웨인의 명언을 설파한다. 나는 이 곡을 얼마나 연습했던가.
나훈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듣고 ‘오륙도’를 무작정 좋아한다. 하지만 오륙도는 우체국과 편의점이 있는 섬마을이 아니라 집 한 채도 지을 수 없는 돌덩어리들임을 그날 알았다. 현실의 섬보다 노래 속의 섬에 홀딱 반해서 반평생을 지내온 나다.
경주 양동마을을 둘러본다. 500여년 전 명문 대가의 건축 양식이 경이롭다. 전통 기와지붕의 모서리가 하늘 쪽으로 치켜진 부분을 보면 좀 무서워진다. 집채가 하늘로 날아갈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풍수지리 운운하던 우리 선조들이 내심 지독한 경천사상(敬天思想)을 품지 않았나 싶지.
안동의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을 살핀다. 천 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이황의 얼굴이 옛날 서울의대 수위실 엄씨 만큼이나 친숙해 보이는 게 이상하다. 그의 사단칠정(四端七情) 학설보다 명기 두향(杜香)과의 러브스토리가 더 기억에 남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앞을 가린다.
그날 밤은 가라오케 노래방 순서. 김중권 형의 잠재적 Y당 마인드와 내가 남을 선동한다. 아내들이 ‘그대 없이는 못살아’를 제창하며 심하게 몸을 흔든다. 김윤성의 무반주 노래 ‘언제까지나’의 가사가 수상하다. 술이 자꾸 먹힌다. 변영석 형이 무슨 노래를 했지. 김윤태는? 김창남이가 일찍 떠나서 자리에 없고 한오수가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이 안 나네. 끝 무렵, 모두가 손을 잡고 ‘만남’을 힘차게 부르던 중, 이숭공이 풀썩 주저앉는다. 최용이 그를 응급실로 데려갈 것을 제안한다. 다음 날 이숭공은 원기왕성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술이 좀 과했다는 사랑스러운 지적이 있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고려시대에 만든 108계단을 오르면서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노구(老軀)를 학대했다. 의상대사와 선묘(善妙)낭자의 사랑에 힘입어 무거운 바위가 붕, 떠있다는 부석사(浮石寺)의 의미를 들입다 짓씹으면서.
버스가 롯데호텔에 도착하기 전에 헤어지는 아쉬움에 몸서리치며 나는 도중하차했다. 그렇다. 우리가 과거에 매달리고 싶은 이유는 우리의 현재가 바로 과거이기 때문이다. 윌리엄 포크너의 말처럼. -- 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심지어 과거는 지나가지도 않는다. (The past is never dead. It’s not even past.)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쓴 내 졸시(拙詩) ‘씨족사회’가 이런 식으로 끝난다. … (전략) 양동마을 양반동네 종갓집 구름들이 / 무명옷을 걸치고 집을 나온 / 오늘은 타운 홀 미팅이 열리는 날 / 반 백 년 전 헤어진 서울의대 / 23회 동기들이 다시 모이니까 / 무 배추 지렁이는 고사하고 / 양반마을 풍수지리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 보이느냐, 이 혈기왕성한 씨족사회가.
© 서 량 2019.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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