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27. 무서운 게 쿨하다고?

서 량 2018. 12. 17. 05:58

내가 일하는 정신과 폐쇄 병동의 몇몇 깡패 끼가 있는 환자들은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다닌다. 성미 더러운 악당이 화를 내듯 ‘V’자 모양으로 양쪽 눈꼬리 끝이 치켜 올라간 선글라스가 무섭고 위협적이다. 커다란 안경알이 두꺼비 눈처럼 불쑥 튀어나온 선글라스의 그로테스크한 모양새 또한 섬찟한 데가 있다.

 

나는 그룹 치료를 할 때 그들에게 선글라스를 벗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들은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쓴 사람에게 상대가 거부감을 느끼는 대인관계, 더구나 의사와 환자 사이에 그런 관계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내심 알고 있다. 내가 하는 말에 대한 반응을 알기 위해서는 모두의 눈을 볼 필요가 있다는 설명을 순순히 받아드리는 그들이다. 나는 눈이 영혼의 창이라는 격언조차 들먹인다. -- Eyes are the window to the soul!

 

한 환자가 선글라스를 쓰면 쿨하게 보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한 사람이 자기의 눈을 완전히 감춘 채 다른 사람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 쿨하다고 느끼는가, 하며 나는 삐딱한 질문을 던진다. 만약 나마저 선글라스를 쓰고 너희들 앞에 앉는다면 기분이 어떻겠느냐?

 

잠시 후 누군가 까만 유리로 눈을 가린 사람은 눈알이 없는 해골처럼 무서워 보인다고 말한다. 나는 그와 동의하면서 눈동자 없는 하얀 눈을 기분 나쁘게 치켜 뜨는 악령이 나오는 공포영화를 떠올린다.    

 

사람들 간에 오가는 말도 마찬가지다. 가령 영혼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기껏 속마음을 다 털어 놓았는데 당신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그건 마치도 기쁜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나를 향하여 당신이, 이를테면 지뢰를 제거하는 현장을 감찰하기 위하여 비무장지대에 새까만 맥아더 안경을 쓰고 출현한 정부 고위급 인사처럼 위협적인 표정을 짓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끼리 눈빛을 주고 받거나 말을 주고 받으면 서로 마음이 놓이는 것은 쌍방의 마음이 상대를 향하여 열려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안도감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정신분석학에서 내세우는 몇가지 조항 중에 자제의 원칙(rule of abstinence)’이 있다. 분석가는 환자가 말을 할 때 호들갑스럽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지 않을뿐더러 호기심에서 나오는 사적인 질문을 피하고 대화의 초점을 환자에게 돌려야 한다는 원칙이다. 세션 동안 정신과의사는 입에 재갈을 물려야 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옛날 얘기지만, 세션 도중에 손녀딸 사진을 보여주며 환자와 기쁨을 만끽하려던 정신과의사를 해고시킨 후 나와 상담을 다시 시작한 청년이 있었다. 그 의사는 환자 앞에서 정신적인 선글라스를 쓴 채 환자가 자기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행동을 자외선을 차단하 듯 차단하는 자제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Eyes are the window to the soul, 눈은 영혼의 창이라는 말을 음미한다. ‘window’는 고대 영어의 ‘wind(바람)’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사실에 당신이 눈독을 들이기 바란다. 그리고 고대 서구인들의 창은 현대식으로 밀봉된 유리창이 아니라 그냥 뻥 뚫린 공간이었던 점도 유추했으면 한다. 우리의 창은 유리창이지만 그 옛날 그들의 창은 늘 열려 있거나 얼추 막아 놓아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환기장치였던 것이다.

 

이제는 알겠다. 우리의 눈은 밀폐된 공간에 영혼을 숨겨 놓은 성능 좋은 앤더슨 윈도우가 아니라 통풍이 잘되는 열린 공간의 입구라는 것. 환자의 기운(氣運)이 바람처럼 내 영혼의 내실(內室)로 잠입하는 정황을 조절해야 된다는 것. 그리고 때에 따라 환자가 내뿜는 독기 어린 바람을 차단하는, 좀 무서워 보이는 정신적 선글라스를 써야 한다는 것을.

 

© 서 량 2018.12.16

--- 뉴욕 중앙일보 2018년 12월 19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