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00. 위시본(Wishbone)

서 량 2017. 11. 27. 12:29

오래 전 딸과 함께 한 추수감사절 디너에서 터키의 'wishbone'을 둘이 잡아당겨 부러뜨렸던 적이 있다.

 

위 아래를 꾹 눌러 놓은 'V' 모양의 터키 뼈가 뚝 부러지자 서로 손에 쥔 가느다란 뼈의 길이를 대조하면서 더 긴 뼈를 들고 있는 사람에게 행운이 부여된다는 미신을 믿기로 우리는 다짐한 것 같다. 이 경쟁에서 나를 이긴 딸이 차후에 무슨 소망을 성취했는지 모르지만.

 

고대 로마시대부터 있어 온 이 추수감사절 풍습은 로마인들이 닭을 신성시하던 전통에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매일 크게 울어 새벽을 알려주는 닭의 신비한 능력을 숭상했던 로마인들은 닭 뼈를 어루만지며 소원을 빌었단다.

 

영국에서도 16세기경 성행하던 이 관습을 'merrythought (즐거운 생각)'라 불렀다.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 온 청교도들이 추수감사절에 닭 대신 야생 터키를 잡아먹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터키의 쇄골(鎖骨)을 부러뜨리는 습관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19세기 중엽에 'wishbone'이라는 이상한 단어가 생겨났다. 영한사전에 '위시본'이라고 싱겁게 나와있다. '소망 뼈'라 하면 어떨까 싶은데.

 

'wish(소망)'는 전인도유럽어로 'desire(욕망)' 혹은 'lust(정욕)'이라는 뜻이었고 'Venus (비너스)', 'venerate (공경하다)' 같은 'v'자 돌림 단어들과 말뿌리를 같이한다.

 

옛날 서구인들은 자기네들의 정교한 감성을 분류하는데 익숙하지 못했다. 현대인을 자처하는 우리는 어떤가. 뇌리에 뿌리 박힌 어원학적 원시상태에서 보면 소망, 욕망, 정욕, 사랑, 그리고 공경심 사이에 큰 차이가 없지 않은가.

 

'바랄 망'()자 돌림의 한자어가 수두룩하다. 소망이나 욕망은 물론 열망, 갈망, 희망, 그리고 나쁜 뜻으로 낙망, 절망, 원망도 있다. 이런 단어들이 조석으로 사람 마음을 상대하는 나 같은 정신과의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중 가장 매력적인 개념은 단연 희망(希望, hope)이다.

 

'hope'는 일찌기 고대영어에서 미래에 대한 신뢰, 특히 신을 향한 믿음을 뜻했다. 'wish'보다 훨씬 더 진보된 정신상태다. 저 때묻은 정치 용어 청원, 청탁, 부탁 같은 끈끈한 인맥의 병폐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미래지향적 성향의 개인이 추구하는 비전(vision)의 신선한 향기를 풍긴다.

 

희망은 소망이나 소원보다 더 밝은 느낌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동요 가사를 "우리의 희망은 통일"이라 바꿔 놓고 활기차게 노래해 보라. 어딘지 아귀가 맞는 것 같아서 기분이 영 거시기해지지 않는가.

 

요청, 신청, 간청같이 청자로 끝나는 말로 청원, 청탁 외에도 청구, 청원, 청유처럼 청자로 시작하는 말을 살펴본다. 하나같이 사람 냄새가 폐부를 찌르는 단어들이다.

 

말씀 언()에 푸를 청()이 합쳐진 한자어 청()자를 보라. 푸른 말? 아니다. '푸를 청'의 두 번째 뜻 '젊은 사람'이 하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요청, 신청, 간청의 상황이다. 요청의 언어는 젊고 미숙한 사람이 점잖게 (젊지 않게) 원숙한 사람에게 손을 벌리는 세팅(setting)에서만 일어난다. 동양적인 젊은이들이여, 기성체재의 눈치를 잘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청구서를 디밀지어다.

 

(), 영어로 'ask'도 전인도유럽어로 'wish'처럼 욕망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인지 서구적 사고방식의 젊은이들은 무엇을 요청할 때 당당하다. 그들은 어원학적으로 다른 사람의 ''보다 스스로의 동기의식에 매달린다. 내 욕망을 남에게 떠맡기지 않고 내 스스로 추구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이토록 동양의 단체주의적 의존성과 서구의 개인주의적 독립성의 차이점을 통감하는 2017년 늦가을이다.

 

© 서 량 2017.11.26

-- 뉴욕중앙일보 2017년 11월 29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