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50. 별들의 전쟁

서 량 2015. 12. 29. 08:51

2015 크리스마스 아침'Star Wars' 에피소드 7, 'The Force Awakens'를 보았다. 

 

요새 한국에서는 영어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 유행이라 'Star Wars' '스타워즈'라 하는 것을 그러려니 한다. 그러나 굳이 우리말 번역을 하고 싶어서 '별의 전쟁들'이라 할까 하다가 '별들의 전쟁'이 더 멋지다는 결론을 내렸다. 별안간 한국영화 '별들의 고향'이 떠오른다.

 

1974년 당시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다는 별들의 고향에 나온 안인숙 역, 오경아의 티없이 맑고 착한 성품에 나는 심하게 감동한다. 이창환과 고은정, 한때 우리의 젊음을 대변했던 두 성우의 목소리가 아우러지는 대사가 심금을 울린다. '오랜만에 같이 누워 보는군. -- 행복해요. 꼭 껴안아 주세요' 하는 대사가 귀에 쟁쟁하다.

 

“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 (오래 전 머나먼 은하계에서…)” 하는 자막이 금관악기의 화려한 주제 멜로디를 타고 캄캄한 우주로 사라지는 스타워즈의 시작 장면이 떠오르는가, 당신은? 그리고 별들의 고향 첫 장면에서 음독 자살한 경아의 뼛가루 상자를 품에 안고 터벅터벅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가는 신성일 역, 화가 김문호의 쓸쓸한 모습 또한 기억하는가.

 

'별들의 전쟁'이 우주 공간의 권력다툼을 소재로 삼았다면 '별들의 고향'은 가부장적 시대를 누비는 한 여자의 성()에 대한 시련과 애잔함이 드라마틱한 슬픔을 집대성한다. 1969년에 미국이 달에 착륙한 후 끝없는 우주로 눈길을 돌린 미국과 한국의 감성이 무한공간을 정복하려는 쌈질과 내면으로의 여행길로 갈라섰다는 말인가, 이것은.

 

1977년에 초연된 스타워즈가 관객들에게 퍼뜨린 유행어가 “May the force be with you. (힘이 그대와 함께 하소서”. ‘force’를 어떻게 번역했나 했더니, 그냥 포스라 옮겼구나. 그래서 이번에 나온 에피소드 7의 부제 ‘Force awakes’깨어난 포스라 번역한 것이다.

 

‘force’ 13세기에 고대불어로 힘으로 정복하다는 뜻이었는데, 내 정말 그럴 줄 알았다, 14세기 초에 이 말에 여자를 강간한다는 뜻이 보태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세상은 힘깨나 쓰는 남자들만의 참 동물적인 세상이었다.

 

검정 망토를 걸치고 인공호흡기 숨소리를 훅훅 내면서 상대의 등뼈를 진동시키는 우람한 목소리의 ‘Darth Vader’은 명실공히 전 미국인들의 공포와 경외감의 표상이다. 스타워즈의 제작자 조지 루카스(George Lucas)의 설명에 의하면 ‘Darth’는 암흑이라는 뜻의 ‘dark’를 암시하는 신조어, 그리고 'Vader'는 'father’의 네덜란드 말이라 한다. 사실 라틴어, 희랍어, 독일어도 모두 다 ‘father’와 발음이 비슷하다. 무섭지 않은가. 암흑의 아버지가?

 

깨어난 포스에서 여전히 개구쟁이 미소를 짓는 한솔로(Han Solo), 해리슨 포드(Harrison Ford)가 자기 아들 카일로 렌(Kylo Ren)의 광검(光劍)에 찔려 죽는다. 그리고 이내 어린 여주인공 레이(Rey)가 금방 아비를 죽인 렌에게 큰 상처를 입힌 후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륙 스카이워커(Luke Skywalker)를 찾아간다. 그렇다! 이제 미국인들의 영웅은 무서운 아버지나, 그에 대적하는 운동신경이 뛰어난 아들이 아니라 출생이 분명치 않고 몸집이 자그마한 여성이다.

 

눈 앞에 적이 얼씬하면 광검을 휘두르며 날뛰는 별들의 전쟁이 보여주는 눈부신 액션보다 천진난만한 내면으로부터의 사랑을 추구하는 한 여인의 부서진 꿈이 잿가루로 흩어지는 별들의 고향에 한층 더 정이 쏠리는 2015년 연말이다.

 

© 서 량 2015.12.28

-- 뉴욕중앙일보 2015년 12월 30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