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3일을 아무래도 쉽사리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날 프랑스 파리에서 극악무도한 무장 테러범들이 무고한 일반인 129명을 죽였다. 거의 같은 날, 서울 광화문에서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수만 명의 반정부 시위대가 경찰과 승강이를 벌였다. 기독교인들이 미신적으로 싫어하는 13일, 금요일에 지구촌 두 곳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몸싸움을 한 것이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 못잖게 약자도 강자를 못살게 군다. 우리는 전자를 갑질, 후자를 을질이라 이름한다. '질'은 상대를 공격하거나 달갑지 않은 '짓'을 하는 것을 이른다.
'학대 당한 부모(Battered parents)'라는 새로운 증후군에 대한 보고가 1979년에 처음으로 '미 정신과 저널(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에 공식 발표된 적이 있다. 살부문명(殺父文明)을 전제로 하는 20세기 프로이트 학설을 따르는 지성인들에게 이 논문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늘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를 질책하는데 익숙한 우리들이기 때문에.
후크 선장을 골탕먹이는 피터팬의 영광도(1904), '얄개전'에 나오는 개구쟁이 나두수의 말썽부리기도(1954), 아무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영국영화 'Clockwork Orange' (한국에 '시계태엽 오렌지'로 알려짐, 1972) 주인공 알렉스의 정신상태도, 다 을질로 보아야 한다. 내친김에 하는 말이지만 영국의 로빈 후드도 우리의 홍길동도 실은 모양새 좋게 잘 빠진 을질의 대가들이다. 갑질이거나 을질이거나 이쯤 되면 인간은 힘과 힘의 대결이라는 중독현상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다.
인터넷에 갑질을 영어로 뭐라 하느냐는 질문이 떴고 그럴 듯한 대답도 많이 올라왔다. 갑질을 'bully'라 옮긴 답변이 가장 마음에 든다. 사전에 나온 'bully'의 첫 번 뜻은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이다.
'bully'는 당신이 믿지 못하겠지만 1530년대에 남녀를 불문하고 'sweetheart (애인)'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리고 이 단어는 어원학자들 간에 'brother (형제)'와 말뿌리가 같다는 소문이 난 것도 사실이다.
이 애틋한 말이 17세기 중반에 들어서서 급기야는 큰소리치는 사람, 또는 약한 사람을 못살게 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변했다. 하다못해 18세기 초에는 창녀를 보호해주는 뚜쟁이라는 의미도 생겨났다는 데야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방금 내가 한 진술에서 당신은 두 가지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첫째, 큰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사람은 남들을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지혜일 것이며 둘째로는, 남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자칫 잘못하면 남을 괴롭히는 사람으로 전락한다는 당신 몸이 부르르 떨릴만한 각성이다.
원래 긍정적인 뜻에서 출발한 'bully'에는 이런 이상한 양면성이 숨어있다. 이 말이 현대어에서 나쁜 뜻으로 타락한 것은 그만큼 현대인의 타인을 향한 애정이 깡그리 사라졌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호해 주는 사람이 취하는 행동을 갑질로 보는 풍조에 우리가 푹 젖어있다는 말도 된다. 그 이전에 자타가 공인하는 갑질이 존재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 갑질의 시대가 가고 을질의 시대가 온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생겨난 미국 슬랭에 'Bully for you!'가 있다. 원래 그냥 단순히 '장하다!' 하는 감탄의 뜻이었는데 현대어에서는 약간 비꼬는 말투로 '잘났다, 잘났어!' 하는 아주 묘한 뉘앙스를 지닌 말이다. 애인이라는 뜻의 'bully'가 어찌 남을 괴롭히는 사람으로 변했단 말인가. 뭐? 사랑하니까 괴롭힌다고? 당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 서 량 2015.11.15
-- 뉴욕중앙일보 2015년 11월 18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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