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오기 전에 거무죽죽한 나뭇가지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시퍼런 나뭇잎들만 춤추듯 들썩이는 이상한 바람이 불더니 이내 캄캄한 빗줄기가 휘몰아쳤다.
몸이 아파 종일토록 집에서 약 먹고 쉬면서 TV에서 ‘Before Sunset'이라는 영화를 봤지. 장소는 파리. 여자는 짭짤한 파리여자. 남자는 얼빠진 뉴욕양키. 남녀는 9년 전에 비엔나에서 우연히 만나 즉각 사랑에 빠져 밤 공원 벤치에서 두 번인가 섹스를 하고 몇 달 후에 다시 그 자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여자가 무슨 이유로 가지 못하지. 지금 남자는 5살 난 아들 때문에 이혼을 하지 않고 덤덤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여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남자친구를 자꾸 놓치는 가련한 독신녀. 남자는 작가, 여자는 환경보호기관에서 일하는 원칙이 뚜렷한 갈색머리. 남자가 자기와 그 여자와의 사랑을 소재로 해서 쓴 소설이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됐다는 설정. 남자는 북사인을 하러 파리에 왔고 그 여자가 그 책방에 느닷없이 나타난 거지.
남녀는 같이 걷고 웃고 커피 마시고 쉬지 않고 재잘거린다. 남자는 해가 지기 전에 공항에 가야 하는데 그때까지 그들은 상대 마음을 콕콕 찌르는 말을 재빠르게 주고 받는다. 결말? 여자가 남자를 지 아파트에 데리고 올라가 자기가 작곡한 노래를 둥둥 기타를 치며 부르고 심하게 교태를 부리는 부분에서 내가 야, 너 그러다가 비행기 놓치겠다! 하는 생각을 하는데 영화는 끝난다. 원 세상에 저렇게 시종일관 남녀가 말만 하다가 마는 영화는 처음 보네, 서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이인데 키스도 한 번 안 했어! 하며 중얼거리며 나는 약 기운으로 캄캄한 잠에 빠진다.
잠에서 깨어나 창 밖을 봤더니 태양이 구름을 뚫고 핏발 선 눈알을 부라리고 있네. 꿈 속에서 나는 그 영화 남자 주인공이 돼서 당신에게 뜻도 모르는 말을 두런두런 했고 당신도 덩달아 내게 뭐라 뭐라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 Before Sunset: Ethan Hawke와 Julie Delpy가 주연한 2004년도 영화
© 서 량 2009.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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