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4

늦가을 묘지 / 김정기

늦가을 묘지 김정기 비석에 앉은 잎새가 찬이슬에 젖어 있고 국화 화분이 저녁 빛에 노랗다 캔시코 공원묘지에 빗소리를 내며 낙엽이 쌓인다 십년을 누어 있어도 아프지 않다고 당신은 금방 등을 털며 일어나 앉을 듯 눈앞에 있다 내 자리도 준비되어 잔디들은 시퍼렇게 살아 소리친다 풀씨 한 알이 당에 떨어져도 시간 탓이고 한 목숨 묻히는 찰나가 다가서니 이제 버릴 것도 더 가질 것도 헤플 것도 아낄 것도 없다 무섭던 친구에게도 손 내밀고 고요하게 땅에 누워 기다리는 하늘에서 살련다 엊그제 같은 우리의 평생이 떠올라 아이들 어릴 때 사진을 꺼내 보며 이 가을을 누린다 © 김정기 2016.12.23

아홉이라는 숫자 / 김정기

아홉이라는 숫자 김정기 서서 울고 있다 평생 그는 서있었다 앉거나 누우면 여지없이 허물어지므로 서서 하늘을 지키고 있었다 노을이 지고 새해가 닥쳐오니 또 한권의 일기장을 9불 99센트에 샀노라고 성탄카드에 썼다 숨어있는 우리말을 찾으려고 9th Avenue 골목길에서 모래로 삭아가는 돌집을 이고 비에 젖어 서 있다 은빛 머리가 더욱 빛나 극치에 도달한 모습으로 겨울의 평화를 땅 위에 내려놓으며 그는 조용히 깨어나고 있다 © 김정기 2015.01.23

사람의 마을 / 김정기

사람의 마을 김정기 사람의 마을에 다녀가는 건 여름 숱한 넝쿨들이 손을 뻗어 야채 가게에서 잘 익은 과일들은 한 사람의 발자국을 응원하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말이 나지 않는 평생은 끝내 물고 늘어져 세상 끝까지 데리고 간다 여름의 한복판에 비가 내리면 더욱 싱싱해지는 강아지풀 벼 포기 사이를 뛰노는 메뚜기들도 사람냄새가 그리워 알을 깐다 사람은 나를 끌고 여름의 끝으로 가지만 찌르레기 소리에도 놀라워하는 나는 끝내 여물지 못한다 여름은 지구 속 속을 녹일 줄 알지만 그대 입안에 숨죽인 말 한 마디를 녹이지 못한다 여름이 빠져나가는 길목에서 사람들은 벌써 추위를 타며 마을을 떠나 웅크리고 달력을 본다. © 김정기 2011.07.30

이끼 낀 돌 / 김정기

이끼 낀 돌 김정기 속 깊이 자라고 있는 멍 자국을 만져가며 푸른 것은 푸른 것끼리 덧나서 이끼 입고 있는 돌은 외로움을 만들어 피라미들이 떼 지어 와도 요동치 않는 어금니 앙다물고 두 주먹 움켜쥐었구나.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굴러야 빛난다고. 여름 저녁 빛이 창으로 쳐들어올 때 아직도 홍조 띄우며 황홀해 하고 평생 한 가지만 붙잡고 웅크리고 앉아 반짝이지 못 하였다네. 온몸에 푸른 멍들고도 울지 못 하였다네. © 김정기 2010.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