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8

우유 따르는 여자 / 김정기

우유 따르는 여자 김정기 아직도 여자는 우유를 따르고 있다. 삼백 년도 넘게 따른 우유는 넘치고 넘쳐서 어디로 해서 어느 강으로 몸을 섞었을까. 왼쪽 창문을 통해 들어온 태양은 여자의 왼쪽 팔에서 튀고 짙은 남색 앞치마에 안긴다. 그리고 머릿수건 뒤에 가서 빛으로 조용히 머문다. 허름한 부엌 벽 위에 걸린 바구니 속에 담긴 곡식은 아마 지금쯤 싹이 나서 셀 수 없는 낱알을 만들었겠지 그러나 보았다, 식탁보 밑에 깔린 두꺼운 어두움 알 수 없는 그 나라의 냄새가 풍겨온다. 베르미어*는 신들린 붓으로 고요를 만들고 순하게 네모 반듯한 감옥에 서서 끝없이 우유를 따르고 있다 그 소리가 지금 나의 잔에도 스민다. 윗저고리의 황홀한 겨자 빛깔이 나부껴온다. 썩지 않는 빵들이 식탁 위에서 계속 발효되고 있다. *1..

익명의 마을 / 김정기

익명의 마을 김정기 오늘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나서 태양을 처음 보았네 갓난아이의 눈에 비추인 빛이 되어 눈을 뜰 수 없도록 눈부셨네 외로운 지구의 흙 계단이 혼자 쏟아내는 햇살 곁에서 서있네 사람들의 마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비집고 흠집으로 살아나 칭얼대고 삼십 년 동안 허공에서 소용돌이 쳐 다른 땅 다른 하늘에 서 있다네. 한 번도 태양을 못 본 마을사람들은 몰려와 태양에 대하여 묻고 있네 아직 태양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모른다고 더구나 죽음에 대해서는 더욱 모른다고 딱 잡아 대답 했네 돌아누우면 남이 되는 사람들은 세상의 시간을 계수하며 숨긴 이름을 찾으려 아직 머물고 있는 다른 가을을 기다리네. © 김정기 2011.02.09

|詩| 떡갈나무의 오후 4시

누가 하루의 극치가 정오에 있다고 했나요, 누가 오후 네 시쯤 개구리 헤엄치 듯 춤추는 햇살의 체취를 얼핏 비켜가야 한다 했나요 봄바람은 이제 매끈한 꼬리를 감추고 없고, 초여름 뭉게구름이 함박꽃 웃음으로 지상의 당신을 내려다 볼 때쯤 누가 작열하는 오후의 태양을 품에서 밀어내고 싶다 했나요 반짝이는 떡갈나무 잎새들 건너 쪽 저토록 명암이 뚜렷한 쪽빛 하늘 속으로 절대로 철버덕 몸을 던지지 않겠다고 누가 말했나요 © 서 량 2009.05.29

발표된 詩 2020.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