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체스터 4

물의 이력서 / 김정기

물의 이력서 김정기 아무리 보아도 닳지 않는다. 달력도 없는 흰 벽과 반듯한 복도 이해할 수 없는 간판을 읽으며 헤맨다. 내가 물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고 꺼내지지 않는 젊음을 안으로부터 끌어올린다. 그 흰 벽에서 물이 흐르고 보이지 않는 손들이 나와서 확대경으로 살핀다. 오래전 산수유 꽃에 이슬로 내려와 가슴이 빨간 새의 지저귐에 흘러 살 개천 돌 틈 사이에 몸을 적시고 금강의 상류로 동해바다로 떠다니다가 대서양 구름떼에 섞여버렸다. 웨스트체스터 상공에 서 소나기로 내려 잃어버린 진찰실에서 맑은 유리잔에 부어진다. 그동안 내가 맑게 스미는 한 방울의 물이었음이. © 김정기 2012.03.31

연분홍 양산을 쓰고 / 김정기

연분홍 양산을 쓰고 김정기 웨스트체스터 하늘을 통째로 가리고 자외선이 분결같은 얼굴에 닿을 세라 몸에 남은 물이 다 태워질 세라 통증가득 실은 비행기가 처 들어 올 세라 폐허에서도 달콤한 감각을 가져 다 주는 연분홍 양산을 쓰고 외출을 했다 맑은 칠월 땡볕을 가리려 진분홍 반짝이마저 달려있는 날아갈 듯 고운 양산을 쓰면 머나먼 것들이 보이고 연약한 부분에 힘줄이 생기고 가마꾼이 없어도 가파른 산엔들 못 오르리. 연분홍 양산을 쓰고. 아! 그림자도 반짝이는 양산을 쓰고. © 김정기 2011.07.02

겨울나기 / 김정기

겨울나기 김정기 바람 소리 몸속으로 스며들어 찬물에 손을 씻고 밀봉된 연서를 뜯어보는 영하의 밤 우리는 흘러간 것들 때문에 밀려오는 것을 밀어 내며 불을 지핀다 얼지 않은 바다를 건너 참나무 장작 불꽃이 되어 타 오르는 그는 시인은 영웅을 닮아 운명과 대결하며 끝없이 싸우다가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고 그럴 때 빛나고 아름답다고 이처럼 매혹적이고 장엄한 것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며 朔風도 영어로 불어오는 땅 아!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내가 사는 웨스트체스터를 달구고 있다 덩달아 나도 뜨거워져서 껴입은 옷을 벗어 휘영청 떠 있는 달 위에 걸며 겨울을 난다. © 김정기 2011.01.18

숲 / 김정기

숲 김정기 숲은 새벽의 기미로 달콤하다 술렁이며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어울려 여름을 만든다. 쓰르라미가 자지러지는 청춘의 손짓을 그때 그 순간을 잡지 못한 숲은 기우뚱거린다. 감춘 것 없이 다 들어낸 알몸으로 땡볕에 땀 흘리며 서있는 나무들에게서 만져지는 슬픔 절단해버린 발자국을 수 없이 되살리며 그들의 반짝임에 덩달아 뜨거움을 비벼 넣는다. 올해 팔월도 속절없이 심한 추위를 타는데 매일 시간은 새것 아닌가. 내 안에 충동은 오늘도 못 가본 곳을 살피지 않는가. 뒤 돌아보며 챙기지 못한 것 숨결 안에 가두고 오랜 비바람에 시달린 나무들의 얼굴은 상쾌하고 환하다 그들의 표정은 언제 보아도 편하다 더구나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웨스트체스터*의 여름 숲은. *뉴욕 북부 © 김정기 2010.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