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3

흰 눈 벚나무 / 김종란

흰 눈 벚나무 김종란 벚꽃 어리는 눈 핏발이 서린 겨울이네 흰 눈 벚나무 수정 빛 여행가방 손잡이 알맞게 누그러졌으니 가볍든지 무겁든지 무릎 꿇고 양말을 개며 바지 탁탁 털어 접으며 오늘의 수업 마치고 목숨의 한 부분 말끔히 지운다 살아있어, 그 신비로움으로 뭉싯거리는 몸짓으로 문을 열고 낮고 짙은 회색 구름속에서 이무로이 찰라의 것들 낌새를 훔쳐내지 눈을 찌그려라도 뜨고 응시하면 물꼬가 터져 흰 눈 벚꽃이 진다 검붉은 열매가 드러난다 살아있어 봄 겨울에 흰 눈 벚나무 © 김종란 2011.02.06

깊은 겨울 눈 이야기 / 김종란

깊은 겨울 눈 이야기 김종란 눈은 온다 모든 올 수 없는 것 만날 수 없는 것 위하여 눈은 와서 펑펑 내린다 갑자기 멀리서부터 잿빛으로 어두어지다가 불현듯 화안하게 온다 누군가 몰래 악기를 연주해 주듯 살쾡이처럼 뛰어드는 재앙의 상흔도 점점이 사라져가는 숨은 음악 두 눈을 가리는 아가의 손처럼 말랑말랑하게 다가와 나의 폐허를 가려준다 흰 손가락으로 검은 웅덩이를 지우고 붉은 눈동자를 지우고 해어진 여행가방을 지운다 뭐 더 없어 하면서 코끝이 시리게 웃는다 힘들게 있는 것들을 그저 하얗게 덮은 후 서늘한 몸짓으로 따뜻한 뺨에 다가와 녹는다 이미 없었던 것을 대변하듯 시리게 다가와 사라진다 함박눈은 헐벗은 것들을 사랑한다 가장 야윈 것 위에 더 포근하게 쌓인다 사라지는 것 볼 수 없는 것들을 조곤조곤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