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 3

백 년 전 / 김정기

100년 전 김정기 100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을 삭이기에 충분한 고요인가 이 건물에 가득하던 풋풋함 모두 어디로 갔을까 헤픈 웃음도 문안에서 졸아들고 여자의 허리에 매달리던 굵은 목소리 공중분해 되고 바람도 서로 껴안던 진주 목거리 풀어져 흩어져서 떨고 있다. 나뭇잎이 내려앉은 스카프에 낡은 실밥 하나 방에 성에 끼던 견뎌내기 어려운 추위 연필로 베껴 쓰던 연서는 세상의 창문을 모조리 닫아걸었지 어두움은 온몸을 덮쳐왔지만 손끝에 닿는 씨앗들 공중에서 떨어지는 빛으로 옷을 지어 입고 길 떠나던 백 년 전 어느 날 한 사람의 세월을 몰래 본다. © 김정기 2012.12.13

11월에게 / 김정기

11월에게 김정기 나뭇잎에 가려 들리지 않던 먼 기적 소리 기침에 묻어 토해내는 맑은 울음 그대에게 가네 닿기만 하면 물이 되어 썩는 육신 씻어 첫 새벽 흔적 없이 잎 떨군 나무 가지에 올려놓는 바다 돌아오지 못할 항해에 배를 돌리는 11월 고요한 것이 꿈틀대며 세상을 덮는 황홀을 오후 네 시의 어두움을 만지며 朱黃볕 한 가닥 눈에 넣어 갈대 한 잎에 고인 이슬 되네 © 김정기 2009.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