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4

흙 갈이 / 김정기

흙 갈이 김정기 꽃나무도 나이 들면서 헛소리를 한다. 십 수 년 묵은 집을 털고 새 흙에 심겨지니 이웃에 낯가림을 하면서 떠난 그늘을 벗어나지 못해 밤새도록 흩어진 친구를 부르다 끝내 실어증을 앓는다. 연한 뿌리들이 감추어둔 얼룩을 찾아 꿈틀대다 꺾이고 상하고 오래된 것들이 살갑지만 낯선 것은 서툴고 불편하다 그래도 새것은 눈부시다. 어두움에 길든 침묵은 햇볕에게 말을 건다. 질긴 끈으로 묶였던 시간들이 토막 나 뿔뿔이 달아나고 뒤섞여도 당신은 거기에 있었구나 창공에서 쏟아진 이름들이 숨긴 어제와 손잡아도 끌어안아도 흩어져버리는 이 땅 한 번쯤 뒤돌아본 당신의 흙 묻은 얼굴 그러나 계속 당신을 향해서만 고개 돌리는 타향 떠밀려온 흙은 그나마 화분에도 못 담기고 버려져 엉겅퀴를 키우지만. 장미꽃과 잡초가 ..

|詩| 기차를 위한 감별진단

기차는 폐활량이 열라 크면서 여간 하지 않고서야 몸뚱어리가 뜨거워지는 법이 없대요 철로가 밑에서 받혀주는 균형감각도 대단하잖아 기차는 땡볕과 빗물에 시달리면서도 절대 넋두리를 하지 않는 독종이라지 기차의 특이체질은 유전에서 왔다 합니다 기차는 부끄러움도 없고 반성도 하지 않는대요 사태의 앞뒤를 가리지 않고 시시때때 언성만 높여요 기차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세차게 달리는 기차를 밖에서 볼 때와 멋진 신사복 차림새로 기차 안에서 휙휙 지나치는 창밖을 내다볼 때를 잘 분별해서 묘사해야 된다는 말이겠지 당신과 함께 기차를 타고 어디론지 떠나고 싶어요 © 서 량 2012.05.31-- 월간시집 2012년 12월호에 게재

발표된 詩 2021.03.04

|컬럼| 260. 부끄러운 혹은 성숙한 뼈

우리 마음의 기능 중 초자아(superego)가 자아(ego)를 대하는 품새는 마치도 부모가 자식을 다루는 태도와 흡사하다. 초자아는 법과 질서를 일깨워주는 부성적(父性的)인 면 외에도 자아이상(ego ideal)을 북돋아주는 모성적(母性的)인 부드러움을 지닌다. 정신과 의사 피어스(Piers)와 인류학자 싱어(Singer)가 쓴 "Shame and Guilt" (1971, Norton)를 다시 읽었다. 당신과 내가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수치심과 죄책감의 정신분석적 해석과 인류학적 성찰로 가득한 100페이지 남짓한 얇은 책이다. 부끄러움과 죄의식이라는 우리의 정서는 온전한 초자아의 발육에서 비롯한다고 그들은 강조한다. 일설에 의하면 고대영어에서 '빚을 갚다'는 뜻으로 통했던 'guilt'는 참으로 딱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