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 6

|詩| 여우비 내리는 날

여우비가 내렸다 짙은 안개가 경마장 함성처럼 질주하면서 내 차를 스치면서 험준한 계곡을 빠지면서 여우비가 쏟아지는 거 앞서거니 뒤서거니 파크웨이를 달리는 용모 어슷비슷한 승용차들이 제각각 무슨 굉장한 철학서적을 읽고 있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어요 앞차가 깜박이를 키네 나도 깜박이를 켰지 분명한 이유가 없었어 여우와 호랑이는 그렇게 비 내리는 날 시집 장가를 갔다 청명한 날이면 날마다 그냥 누워 잠만 쿨쿨 자는 종족보존 본능이라니 여우비를 맞으며 나는 슬며시 사라지고 얼굴이 대충 당신을 닮은 내 종족이 살아 남으리라는 생각이 솟았다 불쑥 © 서 량 2007.03.03 세 번째 시집 (도서출판 황금알, 2007)에서

발표된 詩 2021.06.08

|컬럼| 220. 성숙한 방어

사람이 고통이나 불안에 대처하는 심리작용, 즉 방어기전(defense mechanism)을 정신과에서는 크게 네 가지 계급으로 분류한다. 가장 낮은 계급부터 논하자면 첫째 광적(psychotic) 방어, 둘째 미숙한(immature) 방어, 셋째 신경증적(neurotic) 방어, 그리고 넷째로 성숙한(mature) 방어가 최선의 방어다. 당신과 나를 위한 가장 성숙한 방어를 다음에 열거한다. 이것은 성숙한 인격을 도야하기 위한 지침이자 노하우다. 1. 억제(Suppression) 'suppress'는 원래 라틴어의 'sub(아래)'와 'press(누르다)'가 합쳐져서 'b' 발음이 'p'로 변한 말이다. 억제는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육중한 힘이다. 어찌 보면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정부나 종교가 개인..

|詩| 내 손안의 나비**

나비는 나비일 뿐인데 당신은 나비 때문에 장자에게서 엄청난 교훈을 받고, 나는 물색 모르고 겨울 새벽 비몽사몽 잠결에 흥분한다 나비는 나비일 뿐인데 나와 무슨 상관이람 나비가 날개를 팔락이다가 별안간 전신 운동을 뚝 그치는 순간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더라. 나비는 세상이 다 아는 당신의 열렬한 사랑처럼 서서히 죽는다 내 손안의 나비는 흉측하다 곱상한 날개의 진동으로 소슬바람을 일으키던 동심의 나비는 어디로 사라졌나 나비는 더 이상 내 손바닥에 사뿐 내려 않지 않는다 대형 차량사고와 땅이 쩍쩍 갈라지는 재난영화에 쫓기고 밀리다가 나비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평생 슬픔을 잘 감춰며 살아온 나비들이노랑나비, 흰나비, 검정나비, 그리고 저 무시무시한 호랑나비까지 포함해서 © 서 량 2010.02.01

2010.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