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모자 / 김정기 바람모자 김정기 남빛 바람모자 쓰면 겨울하늘을 나를 수 있네 잔가지 쳐버린 우리 집 나무들 틈을 비집고 탱탱하게 부은 구름 떼 속으로 솟아올라서 끝내 사라질 것들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바람의 손을 잡겠네 만질 수 없는 모자챙에 꽃을 달고 비도 눈보라도 뙤약볕도 막아버리고 세상에서 도달하지 못한 나라에서 곤히 잠이 들겠네 바람에 몸을 매달고 먼 곳으로 떠나서 그 빛나는 우주의 맨살을 만나 얽히고 설킨 이야기 풀겠네. © 김정기 2010.11.30 김정기의 詩모음 2022.12.26
허 수 아 비 / 송 진 허수아비 송 진 알곡이 잉태되어 자라는 동안 아무도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진흙 속에 묻힌 발이 시리고 저려도 알곡들이 제 모습대로 자리 잡고 여물기 시작할 때 그는 온 종일 날짐승들과 싸우느라 초주검 꼴이 되었다 뙤약볕에 삭고 비바람에 찢긴 남루를 걸친 채 풍성한 수확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