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볕 4

연분홍 양산을 쓰고 / 김정기

연분홍 양산을 쓰고 김정기 웨스트체스터 하늘을 통째로 가리고 자외선이 분결같은 얼굴에 닿을 세라 몸에 남은 물이 다 태워질 세라 통증가득 실은 비행기가 처 들어 올 세라 폐허에서도 달콤한 감각을 가져 다 주는 연분홍 양산을 쓰고 외출을 했다 맑은 칠월 땡볕을 가리려 진분홍 반짝이마저 달려있는 날아갈 듯 고운 양산을 쓰면 머나먼 것들이 보이고 연약한 부분에 힘줄이 생기고 가마꾼이 없어도 가파른 산엔들 못 오르리. 연분홍 양산을 쓰고. 아! 그림자도 반짝이는 양산을 쓰고. © 김정기 2011.07.02

숲 / 김정기

숲 김정기 숲은 새벽의 기미로 달콤하다 술렁이며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어울려 여름을 만든다. 쓰르라미가 자지러지는 청춘의 손짓을 그때 그 순간을 잡지 못한 숲은 기우뚱거린다. 감춘 것 없이 다 들어낸 알몸으로 땡볕에 땀 흘리며 서있는 나무들에게서 만져지는 슬픔 절단해버린 발자국을 수 없이 되살리며 그들의 반짝임에 덩달아 뜨거움을 비벼 넣는다. 올해 팔월도 속절없이 심한 추위를 타는데 매일 시간은 새것 아닌가. 내 안에 충동은 오늘도 못 가본 곳을 살피지 않는가. 뒤 돌아보며 챙기지 못한 것 숨결 안에 가두고 오랜 비바람에 시달린 나무들의 얼굴은 상쾌하고 환하다 그들의 표정은 언제 보아도 편하다 더구나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웨스트체스터*의 여름 숲은. *뉴욕 북부 © 김정기 2010.08.08

여름 강을 건너는 시간 / 김정기

여름 강을 건너는 시간 김정기 오후 땡볕을 달래는 강물소리에 여름을 덧입고 뒤 돌아보니 세상은 뜨겁게 달아 올라도 지나온 발자국은 차겁기만하다 목이 마른 바람 소리가 닥쳐온 계절의 옷깃을 잡고 오래 찢기고 바스러진 것들이 무성하게 푸르러 강물과 동행한다 가쁜 숨으로 적막을 조우하는 시간을 잠그고 조금씩 여름날을 베어먹는다 어지러운 증세가 녹아 강바람으로 떨리는 피안을 향해 손사래치며 일어서는 강물 문고리를 잡고 허기지고 삭은 오늘을 추스려 한 걸음씩 이 땅에 없는 빛으로 다가 간다 © 김정기 2021.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