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가을 3

|컬럼| 401. 따스한 가을

티. 이. 흄(T. E. Hulme: 1883~1917)의 짧은 시 “가을”(1908) 전문을 소개한다. 약간 차가운 가을 밤에/ 시골 길을 걸었네/ 그리고 얼굴이 벌건 농사꾼 같은/ 불그레한 달이 울타리 너머 몸을 구부리는 걸 보았네/ 나는 멈춰 서서 말하지 않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네/ 그리고 주변에는 동네 아이들처럼 얼굴이 하얀/ 생각에 잠긴 별들이 있었다네 시에 있어서 흄은 낭만과 고전에서 모더니즘으로 넘어오는 이미지즘(imagism)을 이룩한 창시자로 손꼽힌다. 말 수와 수식어를 최소한으로 줄여 말하는 이미지즘 기법은 시 뿐만 아니라 껍데기를 벗겨 놓은 언어의 누드(nude) 데상 같다. 이미지즘은 로코코 스타일의 은유와 상징에 익숙한 예술 비평가들에게는 데면데면하게 느껴지는 시작법이다. 햇볕에 타..

|詩| 따스한 가을

바람 부는 오후에 간들간들 떨어지는 잎새에서 비릿한 향내 피어난다 이거는 중세기 시절 몸집 하나 우람한 흑기사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던 송충이 속눈썹에 코가 알맞게 큰 귀부인의 아득한 몸 냄새라고 우기면 고만이다 나는 바스락거리는 거 말고 아무런 딴짓을 못하는 저 갈색 잎새들은 지들 몸에서 무슨 향내가 나건 말건 도무지 알지 못하지 하늘 청명한 시각에 어둠이 한정없이 깔린 땅으로 나 몰라라 하며 아래로 아래로만 떨어지면 고만이다 곧장 © 서 량 2022.10.8 시작 노트: 가을이면 꽃도 꽃이지만 잎새에 눈길이 자주 쏠린다. 가을은 내 청각과 후각을 자극한다. '중세기'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말이 시각(視覺)으로 돌변한다. 가을이면 몸의 오감(五感)이 달아오를 뿐, 내가 굳이 가을을 탄다는 말은 ..

2022.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