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3

조선고추 / 김정기

조선고추 김정기 삼십 년 넘게 태평양을 건너오던 물결 타고 조선고추 한 그루 파도 칠 때마다 휘청거리는 수족 허공에 심겨져 실뿌리 내렸네. 유리창너머 송화 가루 먹은 소나무 오리나무가 청청한 하늘을 찔러도 한반도에 이는 황사바람에 발 담그고 자라는 토종고추 그 매운 맛. 뉴욕의 바람과 한몸 되려 억울하고 독한 것 삼키고 삼킨 어질고 흰 고추 꽃이 지고 톡 쏘게 매운 고추 한 알 당신의 몸에서 담금질로 익어가는 가늘디가는 핏발 선명하네. 아니라고 손사래 쳐도 모종된 고추 한 그루에 매어달린 우리는 아리고 아린 조선 고추가족. © 김정기 2014.06.10

|詩| 간장에 비친 얼굴

날 맑은 가을날 장독대에 올라가 간장항아리에 얼굴을 집어넣으면 새까만 간장거울 속에 눈 흰자위가 분명치 않은 커다란 얼굴 열 살 짜리 얼굴 내 얼굴이 아닌 얼굴이 보인다 얼른 머리를 빼고 다시 보면 매운 고추와 숯 덩어리 몇 개 무작정 둥둥 떠 있는 간장항아리 속 간장거울 뒤쪽으로 은박지 하늘이 흔들린다 내 얼굴도 세모 네모 마름모꼴 사다리꼴로 일그러진다 크레용으로 북북 그린 그림 유년기 도화지 속 도깨비 얼굴 골이 잔뜩 난 도깨비 이마에 뿔이 크게 두 개 솟아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날 간장항아리 안에서 끈질기게 파도가 친다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파도의 얼굴을 올려다 본다 끝이 안쪽으로 하얗게 말리는 어떤 파도는 나보다 훨씬 키가 크다 © 서 량 2004.10.23 2005년 4월호에 게재 ..

발표된 詩 2022.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