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즈라는 기분장애와 성격장애가 심해서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데다가 법적인 문제조차 겹친 결과로 내 병동에 오래 머문다.
그는 증세가 완화되어 퇴원을 바라본다. 뉴욕 북부 소도시의 ‘Community Residence, 지역사회 거주지’에서 받아주겠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허용하는 기숙사 같은 곳. 그는 그곳의 삶이 엄격한 규율로 운영되는 폐쇄병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에즈라가 마음을 바꾼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퇴원을 하지 않겠다고 우긴다. 병동생활이 너무 힘이 든다며 시시때때 뗑깡을 부리면서 얼마나 자주 직원들을 괴롭혀 왔는데.
직원들이 아연실색하고 있다. 앓던 이빨 빠지듯이 일상의 행복지수가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가 와르르 무너진다. 퇴원을 거부하는 이유인 즉, 생각해보니 이곳이 그곳보다 지내기에 낫다는 것. ‘Better the devil you know than the devil you don’t. – 아는 악마가 모르는 악마보다 낫다.’ 하는 아일랜드 속담을 따르려는 속셈이다.
당신이나 나나 생후 8개월 전후해서 낯을 가리던 시절이 있었다. 아기는 엄마 아버지 얼굴이 아닌 낯선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 공포에 질려 운다. 두 살이 지나면서 낯선 얼굴을 보아도 크게 긴장하지 않는다. 친숙한 환경에서 생소한 환경으로 적응하는 성숙의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아기는 유치원에 가는 첫날을 맞이하고 멀어지는 부모 모습을 백미러로 훔쳐보며 대학교 기숙사로 떠나고 결혼 후 분가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우리의 고난이 평생 지속된다. 낯설고 물 선 곳으로 이사를 가고 직장을 바꾼다. 이혼을 하거나 이민을 가기도 한다. 에즈라는 누구나 겪는 삶의 기본설정에 동의하는 버튼을 클릭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stranger anxiety’와 ‘separation anxiety’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다닌다. ‘낯가림’이 심한 사람이 ‘분리불안’증도 자주 일으킨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불안과 현재 환경과 결별하는 불안이 늘 공존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사건건 말썽을 피우는 멀쩡한 어른을 놓고 ‘탯줄이 덜 떨어졌다’는 표현을 쓴다. 당신도 친척이나 지인 중에 그런 사람이 몇 있을지 모른다. 그들 중에는 타인과의 교류보다 경계심과 피해의식이 앞을 가리는 ‘stranger anxiety’와 인맥의 끈끈함과 결속감을 떠나지 못해서 ‘separation anxiety’에 심하게 시달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 반대 경우도 도처에 즐비하다. 너무 낯가림이 없는 사람이 남을 쉽사리 받아드리는 성향 때문에 사기꾼들의 호구가 된다. 우리 속담에 ‘과부가 마음이 좋으면 동네 시아비가 열둘이다’라는 말이 이상한 호소력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에즈라는 탯줄이 덜 떨어진 놈이다. 자유와 자율성을 누리는 독립정신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제성을 띈 폐쇄병동의 삶을 선호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고집으로 포장된 공포심과 안일위주의 사고방식이 앞을 다투는 정신상태. 그는 미래를 향한 낯가리기의 깊은 늪에 빠져있다.
‘separate’는 15세기 라틴어로 ‘자르다(sever)’, 그리고 고대 불어로는 ‘젖을 떼다(wean)’라는 뜻이었다 한다. 나는 의대 시절 현미경으로 본 ‘세포분열’ 장면에서 하나의 세포 중간에 슬금슬금 금이 간 후 한 생명체가 두 생명체로 분리되어 늠름하게 증식하던 기적의 환희를 떠올린다. 나이 들면 들수록 귀소본능에 귀의하는 생물의 본성을 차치하더라도.
© 서 량 2023.05.28
뉴욕 중앙일보 2023년 5월 31일 서량의 고정 컬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23/05/30/society/opinion/202305301723035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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