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당신도 꿈을 꿀 때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물체를 보면서 환청과 환시 증세를 일으킨다. 헛것을 듣고 본다.
여덟 살 때 살던 집 뒷마당에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 어느 땅거미 지는 저녁 녘 그 밑을 지나가며 무심코 하늘을 쳐다봤더니 지붕보다 키가 큰 나무 꼭대기에서 커다란 괴물이 이빨을 들어내고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기겁을 하고 앞마당 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지금 곱씹어보며 내가 본 것이 ‘환각’이 아닌 ‘착각’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외부 자극 없이 일어나는 감각을 환각이라 하고, 외부 자극을 틀리게 해석하는 것을 착각이라 부른다. 그것은 환시(幻視)가 아니라 착시(錯視)였다.
병동 환자 윌슨의 증상이 환시인지 착시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아무리 두 증세를 분별해서 설명해도 이해를 못하는 지능의 한계가 큰 이유다. 그는 간호실을 가리키며 그곳에 자기와 같은 국적의 아름다운 남미여자가 서있다고 말한다.
안이 훤히 드려다 보이는 그 공간에 아무도 없을 때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간호사가 딱 한 명만 있을 때 그 옆 공간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한데 분명치 않다. 하여간 그와 나 사이에는 이것이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무슨 말을 하건 내가 따지고 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 효과를 정교하게 펼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안개 낀 새벽에 아버지의 유령을 접한다. 그가 정신 증세를 보였다는 학설이 있다. 17세기식 사고방식 대로 당시에 정말 유령, 귀신이 존재했다는 설명도 있다. 신의 존재를 믿듯 유령의 실체도 믿어야 된다는 이론이다. 셰익스피어는 햄릿 뿐만 아니라,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에도 귀신을 불쑥불쑥 출현시킨다. 우리의 민간설화나 성경에도 귀신들이 자주 등장한다.
브루스와 내가 가벼운 논쟁을 벌인다. 신이 그에게 말하기를 정신과 약은 몸에 해로우니 복용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내가 너의 신이 하는 말을 들어야 되느냐? 내 신이 여러 신들 중에 가장 강력한 신이니까 그래야 돼! 그렇다면, 너는 인종주의자처럼 신을 차별하느냐? 이윽고 브르스가 껄껄 웃는다.
‘神’은 한자사전에 ‘귀신 신’으로 나와있다. 미국 지폐에 인쇄된, ‘In God we trust’는 ‘우리는 귀신을 믿는다’? ‘God’에 해당하는 순수한 우리 말은 없다. 도깨비?
우리는 유령이나 귀신을 무서워한다. 말을 하지 않는 유령은 더더욱 무섭다. 언어를 구사하는 유령과 귀신들은 우리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준다는 면에서 지성적인 엔티티로 보아 무방하다. 부처의 화신이 불시에 나타나서 요긴한 귀띔을 해주는 설화도 부지기수다. 귀신은 영혼의 첩보원이다.
고대영어에서 온 ‘ghost’는 ‘귀신’이라는 뜻. 삼단 같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연못 위로 떠오르는 ‘장화홍련전’의 자매가 연상된다. 같은 의미로 라틴어 ‘spirit, 영혼’은 무섭기는커녕 점잖게만 들리지. ghost=spirit=귀신=영혼. 기독교의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에 나오는 ‘령’은 유령의 령과 같은 말. 성령은 즉 신성한 귀신이다.
‘ghost, 귀신’과 ‘spirit, 영혼’의 원래 뜻은 ‘숨, breath’이었다. 숨 속에 영혼이 깃들여져 있다는 발상이다. 나는 거친 숨을 가다듬고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 한 마디 내뱉는다. 귀신과 영혼을 다스리기 위하여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고루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보람찬 삶이라고.
© 서 량 2023.04.30
뉴욕 중앙일보 2023년 5월 3일 서량의 고정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23/05/02/society/opinion/20230502174659149.html
'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컬럼| 442. 낯가리기 (2) | 2023.05.31 |
---|---|
|컬럼| 441. 미국식 교장 선생 (2) | 2023.05.15 |
|컬럼| 439. 흰 토끼를 따르라 (1) | 2023.04.21 |
|컬럼| 438. 피해자 코스프레 (2) | 2023.04.03 |
|컬럼| 437. Multiverse (2) | 2023.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