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26. 남

서 량 2015. 1. 26. 20:45

 요즘 신문에 '갑질'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우리는 사업상 문서계약을 맺을 때 서로의 조건을 명시하기 위하여 갑()과 을()이라는 비유법을 쓰는데 둘 중 상위권에 속한 사람이 갑이고 머리를 조아리는 쪽이 을이다.

 

 '()'은 질병(疾病), 똥질, 치질, 간질 같은 단어에 들어가는 한자어. 옥편은 이 두 글자를 '병 질', '병 병' 하며 같은 뜻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당신은 ''이 증상(symptom)을 뜻하고 ''이 병(disease)이라는 점을 신경을 곤두세우며 이해하기를 바란다. 예컨대 기침은 증상이고 결핵은 병이니까 누가 기침을 좀 한다 해서 큰 병이 있다 속단하지 말 것이며 결핵을 기침약으로 치료하겠다고 덤벼들지 말거라.

 

 중국인 국적의 조선족으로 언어학에도 출중한 정인갑 박사는 2011 3월에 질()의 고대중국어 발음이 ''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 ''의 옛말이지만 현대어에 두 말이 아직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당신이 얼추 '='이라 주장한다면 나는 대뜸 받아줄 요량이다. 대개 ''은 엉큼한 짓, 못된 짓처럼 나쁜 뜻으로 쓰인다. 물론 ''도 부정적인 의미로 둘째 가라면 서럽다. 예를 몇 개 들면 다음과 같다.

 

 도둑질, 서방질, 계집질, 이간질, 고자질, 욕질, 삿대질, 신경질, 싸움질, 구역질, 용두, 그리고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갑질!

 

 ''이 들어가는 말에는 또 중립적인 표현도 수두룩하다. 찜질, 삽질, 비누질, 양치질, 낚시질, 자맥질, 다림질, 바느질, 뜨개질, 손질 같은 단어가 좋은 예다. 또 있지. 선생질! 의사질!

 

 갑질은 지위 높은 사람이 지체 낮은 사람에게 부리는 횡포다. 성추행도 한 사람이 힘의 불균형을 악용해서 다른 사람의 성을 착취하는 갑질의 한 예다. 이 둘은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고 대개 바늘 가는 곳에 실 가듯이 붙어 다닌다.

 

 다시 말해서 갑질은 자신의 권익신장을 위하여 남을 괴롭히는 학대행위다. 서슬이 시퍼런 갑에게 을은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정신과 의사 티를 내며 말하자면 갑질이란 남을 배려하지 않는 성격장애 증상이다. 요컨대 갑에게 남이라는 인칭대명사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을 우리말 사전은 (1)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 (2)일가가 아닌 사람 (3)아무런 관계가 없거나 관계를 끊은 사람으로 정의한다. 나 아닌 사람은 다 남이고, 같은 핏줄은 남이 아니고, 살을 섞는 부부도 이혼하면 남남이란다.

 

 중세기 경 우리 선조들은 '' ''이라 불렀다. 저 자신 외 모든 다른 사람들을 곱게 얕잡아보는 눈으로 이놈, 저놈 하는 심리를 당신은 허용해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원학자 서정범에 의하면 ''''과 말의 뿌리가 같다고 하는 사실이 까무러치도록 놀랍다.(국어어원사전, 2000) 당신도 한번 생각해 보라. 임금님을 '임금놈'이라 불렀던 우리 조상들의 배짱과 지혜를.

 

 영어는 남이라는 개념을 'other person (다른 사람)'이라고 풀어 말하므로 나와 남의 차이점을 극대화시킨다. 고대영어에서 지금은 사라졌지만 'other'의 전신에 해당하는 단어는 'second (두 번째)'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스웨덴과 덴마크 사람들은 건물의 2층을 'the other floor (다른 층)'라 부른다. 그리고 19세기 중엽에 생긴 은밀한 호칭, 'the other woman (다른 여자)'는 유부남의 두 번째 여자, 즉 소실(小室)을 뜻한다. 우리 속어로 '세컨드'!

 

 결국 남(other person)이란 다름아닌 2인칭 대명사, (you)를 일컫는 말이다. 알고 보면 님도 남도 그 실체는 다 당신이라는 놈이다.     

 

© 서 량 2015.01.25

-- 뉴욕중앙일보 2015년 1월 28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