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224. 등뒤에서 부는 바람

서 량 2014. 12. 30. 12:00

 연말이 가까워오면 당신은 곧잘 한 해를 뒤돌아보는 감상에 빠지곤 한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세월의 매듭이 생길 때마다 자꾸 뒤를 돌아본다.

 

 차를 뒤로 뺀다는 뜻의 일본식 영어 '빠꾸'를 나는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들어왔다. 영어와 한국어가 짬뽕된 동사 '빠꾸하다'를 표준 영어로 'back up'이라 한다는 것은 어른이 된 후에 알았다. 'back up'은 또 파일을 백업한다는 컴퓨터 용어인데다 'I will back you up' 하면 그것은 누가 당신의 뒤를 밀어준다는 뜻이 된다. 같은 '백업'이지만 대상이 자동차냐, 컴퓨터냐, 또는 사람이냐에 따라 이렇게 의미가 딴판이다.

 

 'back'''도 이중성이 있는 개념이다. 뒤를 밀어주겠다는 의리의 사나이에게'Get off my back!' 하면 귀찮게 굴지 말라는 매정한 발언이다. 'sit back'은 편하게 앉아서 뭔가를 즐긴다는 뜻이지만 'backseat driver'는 자동차 뒷자리에 앉아서 이래라저래라 운전을 지시하듯 남의 일에 시시콜콜 참견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멀쩡한 비읍을 쌍비읍으로 발음하는 일본식 영어가 또 있는데 백그라운드(background)를 짧게 줄인 단어 ''이 바로 그것이다. 누구는 빽이 좋다거나 빽을 썼더니 어려운 일이 쉽게 풀렸다 할 때 쓰는 우리의 일상용어, ! 가방을 뜻하는 빽(bag)과 한글 표기가 똑같은 빽!

 

 뒤돌아본다는 것은 회고(回顧)한다는 뜻이다. 'look back'이라는 관용어와 한치도 다름없는 말. 이때 'back'은 등쪽, 즉 뒤쪽을 일컫는다. 그래서 '==과거'라는 등식이 성립되지만 영어와 달리 우리말의 ''는 등의 맨 아래쪽에 위치한 항문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뒤돌아본다는 말 대신 '뒤를 본다'는 회고나 추억에 잠기는 고상한 두뇌활동이 아니라 화장실에서 치르는 큰 일이며 뒤가 마렵다는 것은 변의(便意)가 있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뒤가 구리다는 말 또한 인체의 특정부위를 연상시킨다.

 

 40년 전 뉴저지 수련의 시절 근무 중에 어디를 바삐 외출했다 들어온 후 'I just returned from outside' 라며 아주 촌스러운 영어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상대가 'Oh, you're back' 하는 것이 아닌가. 요새도 가끔 누가 'I am back' 하면 머리 속에 그때 그 상황이 떠오른다. ', 이제야 기억이 나요' 라고 말하려 할 때 'Now I remember more clearly' 하며 더듬거리지 않고 'It's coming back to me' 하고 재빨리 뇌까리는 영어가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는 내 언어생활이다. 이것은 'back=빠꾸'라는 고정관념이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의 행동 중에 백허그(back hug)가 포함돼 있다는 것을 읽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가 뒤에서 포옹해 주면 참으로 좋아한단다. 백허그? 장하고 또 장하도다. '빠꾸허그' 혹은 '빽허그'라 하지 않는 것이 천 번 만 번 다행한 일이로다!

 

 내가 좋아하는 아일랜드 축원(Irish blessing)'May the wind be always at your back. May the sun shine warm upon your face' 하는 구절을 혹시 당신은 읽었거나 들어 본 적이 있는지 몰라. (바람은 항상 당신 등뒤에서 불기를. 햇살이 얼굴에 따스하게 비추기를) —- 지난 해가 빽미러(rear view mirror) 속으로 사라진 후 새해에 운명의 바람은 등뒤에서만 불고 당신 얼굴에 햇살이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 서 량 2014.12.29

-- 뉴욕중앙일보 2014년 12월 31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