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묻지마 폭행' 동영상을 무심코 클릭했다. 한 건장한 남자가 길가는 여자를 뒤에서 난데없이 주먹으로 강타해서 쓰러뜨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걸어간다. 젊은 청년이 노인네를 인적이 드문 지하도에서 불문곡직하고 구타한다. 중국, 미국, 영국, 한국에서 올라온 이 끔찍한 비데오들!
누군가 묻지마 폭행을 'Random Acts of Violence'라고 번역해 놓았다. 다시 역으로 번역하면 '마구잡이 폭행'이다. 말 그대로의 뉘앙스를 살려서 'Don't Ask Violence'라 하면 어떨까. 클린턴 대통령이 1993년에 군대의 동성연애자들을 위해 내세웠던 'Don't Ask, Don't Tell' (묻지마, 말하지마) 정책이 연상되는 말이지만.
'Don't ask!'는 대답하기 곤란하니까 묻지 말라는 관용어다. 반면에 'Don't ask me!' 하면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냐는 좀 짜증스러운 일상어다.
케네디 대통령의 1961년 취임사가 생각난다. "Ask not what the country can do for you --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국가가 여러분을 위하여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하여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물으십시오.)
케네디와 클린턴이 'ask'라는 같은 단어를 써서 한 말 내용이 32년 간격을 두고 서로 영 딴판이다. 그 정도 시간이 지나서 시대배경과 두 사람의 관심사가 이렇게 다르다니!
'ask'는 고대부터 현대영어에 이르기까지 '묻다' '원하다' 그리고 '구하다'의 뜻이다. 1970년대 중반에 일본 자동차 토요타의 TV 광고에서 귀따갑게 듣던 'You asked for it. You got it! (원했으니까 가지셨죠!)'가 떠오른다. 이 말은 워낙 '자업자득'이라는 비아냥이었는데 당시에 묘하게 큰 히트를 친 캐치프레이즈다.
'묻다'와 '물다'는 말뿌리가 같다.(서정범, 국어어원사전, 2000) '물을 문(問)'에도 '물 교(咬)'에도 '입 구(口)'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묻는다는 것은 국회 청문회에서처럼 상징적으로 상대를 물어뜯는 행동이다. 말로만 하는 대질심문도 사람을 북처럼 치면서 하는 고문(拷問)도 질문자의 입이 바쁘다. 인간의 입은 그토록 혹독하고 잔인하다.
'ask'는 전인도유럽어로 기도한다는 의미였다. 이쯤 해서 나는 우리말 성경의 권위의식을 피하면서 마태복음 7장 7절의 졸역(拙譯)을 시도하련다. -- Ask and it will be given to you;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찾으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열릴 것이다.)
묻지마 폭행이 우울증, 혹은 빈부의 격차가 심한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의 결과라고 누군가 유창하게 해명하는 장면도 보았다. 저 자신이 길거리에서 무턱대고 얻어맞아 광대뼈가 깨져도 그는 그런 궤변에 급급할 것인지.
묻지마 폭행범들은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화가 났다는 핑계로 쾅! 하며 닫는 문이나, 연신 주먹으로 치는 벽이나, 발로 차는 길거리 깡통처럼 다른 사람을 생명이 없는 물체로 보는 것이다.
계산적으로 약자만 골라서 악감정을 쏟는 그들 자신들도 문이나, 벽이나, 깡통 같은 물체 취급을 받아 백 번 싸다. 그들을 형틀에 묶어놓고 곤장을 매우 치는 사극(史劇) 속 포도청 마당에 출두하여 내가 물어뜯듯이 "You asked for it. You got it!" 하며 소리치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 서 량 2015.02.08
-- 뉴욕중앙일보 2015년 2월 11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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