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철학의 거성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를 자신에 대하여 무엇인가 가르쳐 준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라며 칭송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 극찬한다. 그는 또 1928년에 발표한 '도스토예프스키와 존속살해'라는 논문에서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프스 왕만큼 도스토예프스키의 살부사상(殺父思想)이 인류 문화에 큰 공적을 남겼다고 주장한다.
카라마조프 형제의 장남 드미트리는 유산상속 문제로 가족이 조시마 신부 주재로 모인 수도원에서 아버지와 심한 언쟁을 벌인다. 그는 몸이 찌그러지도록 어깨를 움츠리며 공허한 목소리로 자기 아버지에 대하여 남들에게 뇌까린다. "왜 이런 사람이 살아 있습니까?" 그리고 차분하게 좌중을 둘러보면서 질문한다. "말해 주시요. 이 사람이 세상을 더럽히는 것을 허용할 수 있습니까?"
조시마 신부는 이때 갑자기 드미트리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그리고 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말없이 방을 떠난다. 그 광경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 혼동에 빠진다. 연이어 조시마는 신부 수업을 받고 있는 드미트리의 동생 알요샤에게 수도원을 떠나서 세속적인 삶을 추구할 것을 권고한다. 이쯤 해서 당신은 종교가 인간의 마음을 구원하는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경스러운 느낌에 몸을 떨 것이다.
조시마가 드미트리에게 경의를 표했던 이유는 카라마조프 가족에게 닥쳐올 큰 고난을 드미트리가 체험함으로써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예견한 데 있었다. 그것은 한 인간이 겪게 될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기쁨을 제 삼자가 미리 맛보는 정황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속죄는 타의에 의한 종교적 율법이 아니라 한 인간 스스로가 자의로 체험하는 괴로움을 기반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라는 상징으로 군림하는 종교의 권위의식과 기존체제에 대항하는 드미트리의 용기였으며 구원을 얻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괴로워하는 도덕성이었다.
현대어로 고통을 당한다는 뜻, 'suffer'는 13세기 중엽 고대 불어와 라틴어의 뿌리에 해당하는 말로는 '견딘다'는 의미였다. 고난은 소극적으로 당하는 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견디어낸다는 시각이다.
자, 어쩌겠는가. 당신은 고난을 이겨내겠는가. 아니면 앉은 자리에서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겠는가. 전자가 영웅의 행로라면 후자는 희생자의 말로일 것이다. 옛날 서구인들은 스스로에게 아픔을 허용하는 담력이 있었지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손 하나 까딱하기를 꺼리는 현대인들은 자신을 희생자로 취급할 뿐이다. 이때 나를 해치는 가해자는 물론 남이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지옥은 남들이다. (Hell is others.)
프로이트는 1913년에 발표한 '토템과 터부'(Totem and Taboo)라는 글에서 원시시대의 근친상간에 대한 터부를 논한다. 그는 집 앞이나 동네 어귀에 세워두는 토템을 공유하는 같은 씨족끼리의 성교를 족장이 금지했다고 추리한다. 그리고 원시의 젊은이들이 늙은 아비를 죽이고 동네 여자들을 취하면서 집단적으로 존속살해에 대한 강박증상이 생겨났다고 설명한다.
구약시대에 유대인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다. 고대 희랍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친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비극이 있었고 덴마크 왕자 햄릿의 삼촌이 자기 형을 죽이고 형수를 탈취한 시나리오가 지금도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한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러시아의 카라마조프 형제 중 제일 막내가 아버지를 다시 살해했던 것이다.
가족들이 옷깃을 여미며 모이는 추수감사절이 다가온다. 신의 부재현상과 존속살해의 신경증세가 당신과 나의 뇌리를 스쳐가는 늦가을이다.
© 서 량 2014.11.16
-- 뉴욕중앙일보 2014년 11월 19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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