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육 2

남은 손가락 / 김정기

남은 손가락 김정기 아프리카 어느 섬에는 가족이 떠날 때마다 손가락 하나나 귓바퀴를 잘라 그 아픔으로 이별을 대신한다고 한다. 날카로운 열대의 잎으로 생살을 베이며 상처가 아물면 혈육을 잊지만 또 다음 이별이 오면 다음 손가락을 잘라 다섯 손가락이 없는 그는 어디 육신의 아픔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통증에 비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평생 정을 그리워하는 그의 유언이다. 남은 손가락으로 일하면서도 열 손가락의 힘을 일궈내는 사내의 미소가 화면에 뜰 때 나는 절벽 끄트머리에 무겁게 앉았다가 무중력의 세상으로 가볍게 떠오른다. © 김정기 2013.03.02

행렬 / 김정기

행렬 김정기 우리 동네 잔디들은 짧고 푸르다 깃발도 없이 행진하는 그들은 말이 없다 혹인 촌 아파트 창밖에 널린 빨래 그 남루함에 몸을 떨던 동양여자는 이제 사위어가서 한 포기 잔디로 서 있다. 브람스 심포니 1번 1악장이 전하는 禮砲는 명중하여 꿈속으로 들어오고 말없던 행렬은 몸부림치며 끝없이 광장을 향해 돌진한다. 우우우 바람소리도 길고 우렁찬데 함께 벼락을 맞고도 이어지는 우리는 알고 보니 혈육이다 마른 흙을 뚫고 세상과 얼굴을 대할 때 이미 시들어 있는 가장 길었던 밤은 지나고 잔디 위에 이슬은 아침 볕을 과식한다. © 김정기 2012.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