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4

봄, 비행일지 / 김종란

봄, 비행일지 김종란 비상 착륙한 오지에서 오렌지 몇 알 패랭이 꽃 몇 송이 물 한 컵 루소의 고백록 빈터에 적어 본다 울렁이고 헛헛하다 (이 어지러움을 잠 재울 한마디 말을 기다린다) 눈을 감고 옷깃을 여민다 찻잔에 소용돌이 치던 바람 낯선 바람소리에 입술을 댄다 바람의 기억으로 비행의 속도를 더듬는다 몰두하던 풍경이 조각조각 흘러내려 유리 파편에 스며든다 반짝임을 손끝으로 민다 그 작은 유리문 뒤 배회하던 먼 길 베고 누웠던 길 고양이 한 마리 화들짝 감았던 눈을 뜬다 허기지고 눈부시다 봄은 가벼이 날아가 남겨진 것은 무거워 허기지고 눈부시다 먼 길을 다시 걸어 가야 한다 (한 마디 말을 붙잡는다) © 김종란 2014.04.03

티테이블에는 어제의 햇빛이 아직 남아있다 / 김종란

티테이블에는 어제의 햇빛이 아직 남아있다 김종란 티테이블에는 어제의 햇빛이 아직 남아있다 아무도 오지 않아도 약간 빼어 놓은 의자엔 온기가 서려있다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어서 모서리들이 둥글게 부드러워 보인다 분명 꽃은 없는데 꽃들이 꽃병 안에서 미소 짓는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어제의 그제의 그그제의 햇살이 쌓인다 누가 그곳에 가지 않아도 티테이블은 만나고 있다 사람 산토끼 거북이 종달새 모습들이 불현듯 테이블 언저리를 잡고 웃고있다 티테이블은 몽상의 바다에 자리 잡고있다 내가 온곳에서 몰래 따라온 푸름이 깊어질 수록 더 반듯하게 몸을 펴고 앉아있다 눈을 감으면 티스푼이 찻잔에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시간의 껍질이 벗겨지는 작은 마주침들 족쇄가 차인 발목은 점점 깊은 바다에 가라앉고 열 발걸음쯤 떨어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