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 2

늦가을 묘지 / 김정기

늦가을 묘지 김정기 비석에 앉은 잎새가 찬이슬에 젖어 있고 국화 화분이 저녁 빛에 노랗다 캔시코 공원묘지에 빗소리를 내며 낙엽이 쌓인다 십년을 누어 있어도 아프지 않다고 당신은 금방 등을 털며 일어나 앉을 듯 눈앞에 있다 내 자리도 준비되어 잔디들은 시퍼렇게 살아 소리친다 풀씨 한 알이 당에 떨어져도 시간 탓이고 한 목숨 묻히는 찰나가 다가서니 이제 버릴 것도 더 가질 것도 헤플 것도 아낄 것도 없다 무섭던 친구에게도 손 내밀고 고요하게 땅에 누워 기다리는 하늘에서 살련다 엊그제 같은 우리의 평생이 떠올라 아이들 어릴 때 사진을 꺼내 보며 이 가을을 누린다 © 김정기 2016.12.23

행렬 / 김정기

행렬 김정기 우리 동네 잔디들은 짧고 푸르다 깃발도 없이 행진하는 그들은 말이 없다 혹인 촌 아파트 창밖에 널린 빨래 그 남루함에 몸을 떨던 동양여자는 이제 사위어가서 한 포기 잔디로 서 있다. 브람스 심포니 1번 1악장이 전하는 禮砲는 명중하여 꿈속으로 들어오고 말없던 행렬은 몸부림치며 끝없이 광장을 향해 돌진한다. 우우우 바람소리도 길고 우렁찬데 함께 벼락을 맞고도 이어지는 우리는 알고 보니 혈육이다 마른 흙을 뚫고 세상과 얼굴을 대할 때 이미 시들어 있는 가장 길었던 밤은 지나고 잔디 위에 이슬은 아침 볕을 과식한다. © 김정기 2012.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