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덩이 3

억새꽃 / 김정기

억새꽃 김정기 십일월이 떠나는 들녘에 서서 꽃을 피우는 친구여 밤마다 그림자가 나온다 연기가 나온다. 눈에서 입에서 버렸던 사람이 다시 찾아와 눈이 날리면 만날 수 있다고 알 수 없는 슬픔의 발원지에 힘든 나날을 이겨낸 나를 찾는 손짓이다. 늦가을 억새꽃으로 피어 바람을 타고 가는 길을 막는 손 물기 빠진 몸이 발붙인 웅덩이에서 물거울을 꺼내 본다 가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오는 그림자도 연기도 꽃이 되는 나이. © 김정기 2011.12.01

누덕누덕 기운 돌 / 김종란

누덕누덕 기운 돌 김종란 누덕누덕 기운 마음 천진하게 웃다 옷 매무새 황급히 여미다 돌같이 매끄럽게 바라보다 멈춰 있다 돌 안에 머물다 묵묵히 돌 길 가다 옷깃을 스친 거지의 뒷모습 거지 되기 원했던 커다랗고 묵직한 돌덩이다 점점 굳어지다 움푹 파 들어가는 웅덩이다 잡음이 심한 뉴스다 오늘의 무게를 감당하다 무거워지다 가라앉다 *이우환의 돌을 바라보다 유한의 무게를 안고 무한 안에 자유로이 놓이다 *이우환의 Marking Infinity © 김종란 2011.08.22

깊은 겨울 눈 이야기 / 김종란

깊은 겨울 눈 이야기 김종란 눈은 온다 모든 올 수 없는 것 만날 수 없는 것 위하여 눈은 와서 펑펑 내린다 갑자기 멀리서부터 잿빛으로 어두어지다가 불현듯 화안하게 온다 누군가 몰래 악기를 연주해 주듯 살쾡이처럼 뛰어드는 재앙의 상흔도 점점이 사라져가는 숨은 음악 두 눈을 가리는 아가의 손처럼 말랑말랑하게 다가와 나의 폐허를 가려준다 흰 손가락으로 검은 웅덩이를 지우고 붉은 눈동자를 지우고 해어진 여행가방을 지운다 뭐 더 없어 하면서 코끝이 시리게 웃는다 힘들게 있는 것들을 그저 하얗게 덮은 후 서늘한 몸짓으로 따뜻한 뺨에 다가와 녹는다 이미 없었던 것을 대변하듯 시리게 다가와 사라진다 함박눈은 헐벗은 것들을 사랑한다 가장 야윈 것 위에 더 포근하게 쌓인다 사라지는 것 볼 수 없는 것들을 조곤조곤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