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19

|컬럼| 471. 지구 들어올리기

“내가 설수 있는 단단한 자리와 지렛대를 주면 나는 지구를 움직일 수 있다, Give me a firm place to stand and a lever and I can move the Earth.” 라고 말한 아르키메데스를 생각한다.  ‘내게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주면 나는 성격장애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병동직원에게 나는 속삭인다. 건방지거나 건성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단,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와 나의 시간은 둘 다 충분히 길어야 한다는 점이 이슈다. 부모님 3년상이 우리의 오랜 유교식 전통이지만 현대에는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일정 기간을 약정해 놓은 사회적 통념에는 정신과적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식이 부모를 잃은 트라우마의 심리적 아픔이 어느 정도 사라지는데 그 정도 시간..

눈을 감다, 그리고 뜨다 / 김종란

눈을 감다, 그리고 뜨다 김종란 늦은 저녁 시장 통에서 국수를 사, 초롱에 넣고 걸어오면 벌떼처럼 붐비는 발자국 소리 100년 전, 어느 날 이국 원시의 향 머무는 해당화 꽃잎 틈 지쳐 잠든 도시의 꿀벌 해당화 울타리 넘어오는 물소리, 웃음소리 이른 아침 *East River 위로 선박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흐르는 시간 같아 천천히 움직이는데 어느새 멀리 가 있어 * Manhattan 섬 동쪽에서 흐르면서 Long Island 해협과 연결되는 강 © 김종란 2021.08.15

*일각수의 흰 뿔 / 김종란

*일각수의 흰 뿔 김종란 박물관 깊숙히 어두운 조명 아래 내비치는 너의 흰 뿔 내게로 와 그 흰 뿔이 자라나 협곡 깊이 자리잡은 푸른 돌들의 형제로 와서 신화의 음률, 낮은 울타리가 된다 유월의 **하얀 리본 나무 폭우 속에 내 마음의 비도 그쳐 하얀 리본 나무 음악의 문 소리도 없이 열려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나의 기타에 비스듬히 기댄다 너의 흰 뿔은 어둠 속에서도 평화와 신비의 빛 멈춘 시간 그 곳에 멈춘 신화 낮게 더 깊게 연주되는 사파이어빛 음률 유월을 지나는 하얀 리본 나무 *The unicorn Tapestries (Cloisters museum) ** Cornus Kousa © 김종란 2021.06.09

빈 병 / 김정기

빈 병 김정기 빈 병에 마개를 덮는다. 바람이 들어가 흔들리면 시간이 할퀴어 삭아지면 이 병에 들어있던 녹쓴 칼 한 자루 다시 벼려서 쓸 수 없을까봐 이 병에 넣었던 꿀물 엎질러 진지 오래되었고 쓰고 신 맛에 길들이지 못하고 토해내던 너무 맑아서 깨어질 듯 한 병 하나 품고 있네. 지독한 오한과 목마름도 여기 담겨있었지 저장되었던 그리움의 더께도 문질러 헹구었네. 비워 놓은 병에 드나들던 약속도 저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몸은 나를 떠나가고 있네. 조금씩, 시나브로. © 김정기 2012.10.11

|詩| 시간이여, 안녕

애써 외면을 하려 해도 외면할 수 없는 빛처럼 가랑비처럼 당신은 나를 직면합니다 편안하고 아랑곳 없는 기색입니다 생각해 보면 굳이 꺼림직하다거나 할 것 없어요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어젯밤 황금햇살이 우박같이 쏟아지는 꿈 속에서 철부지 강아지로 마냥 뛰어다녔습니다 놀다가 지쳐서 아무 풀섶에게라도 코를 대고 킁킁대면 들쩍지근한 시간의 냄새가 물씬했습니다 당신이 남긴 흔적이었습니다 나는 어젯밤 꼬리를 살래살래 흔드는 조그만 강아지였습니다 © 서 량 2007.09.16 - 2021.08.04

2021.08.04

|컬럼| 387. 세 개의 시계

“I have two watches. I always have two. One is on my wrist and the other one is in my head. It’s always been that way. - 나는 시계가 둘이야. 늘 둘이 있어. 하나는 손목에 하나는 머리 속에 있지. 항상 그래 왔어.” 2021년 2월에 개봉된 앤서니 홉킨스 주연 ‘The Father’에 나오는 앤서니가 하는 말이다. 왠지 애처롭다는 느낌이 엄습한다. 실재하는 손목시계와 머리 속에서 망가지고 있는 시간개념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치매환자의 극중 이름도 앤서니다. 한국에서도 4월 초에 개봉된 영화다. 고심 끝에 타이틀을 ‘아버지’라 번역하지 않고 그냥 ‘더 파더’라 옮긴 것이 흥미롭다. 84살의 앤서니 홉킨스의 소스라..

|詩| 꿈꾸는 벽시계

벽이 시계와 밀착한다 해변의 추억이 뒤집힌다 파도가 인다 지금은 밀착의 시각 시계의 꿈이 일그러지고 있었어요 시간이 신음한다 웃음을 터트렸어 꿈은 전생의 찌꺼기임이 틀림없대 시간은 마호가니 프레임 안팎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서성이는 외로움이래요 파도가 죽는다 바닷물이 참 따스해 당신은 내 응접실에 안치된 마호가니 프레임이다 종일토록 하릴없이 뎅~ 뎅~ 종소리를 토해내는 © 서 량 2021.04.16

2021.04.17

|詩| 치고 들어오다

치고 들어오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라 -- 비트겐슈타인 1월을 맞이하라 시간이 두 조각으로 갈라진다 헐벗은 떡갈나무 가지 쪽으로 당신이 눈길을 옮기는 사이에 지금 내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요 걸핏하면 발끈하기 갈등관계 지탱하기 일부러 밀어붙이기 서로를 감염시키기 1월을 공격하라 맞받아 치는 사이에 아픔은 사라진다 당신의 슬픔이 침묵 속에 가라앉는다 시간이 떡갈나무를 냅다 흔드는 동안 © 서 량 2021.01.15

2021.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