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5

백 년 전 / 김정기

100년 전 김정기 100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을 삭이기에 충분한 고요인가 이 건물에 가득하던 풋풋함 모두 어디로 갔을까 헤픈 웃음도 문안에서 졸아들고 여자의 허리에 매달리던 굵은 목소리 공중분해 되고 바람도 서로 껴안던 진주 목거리 풀어져 흩어져서 떨고 있다. 나뭇잎이 내려앉은 스카프에 낡은 실밥 하나 방에 성에 끼던 견뎌내기 어려운 추위 연필로 베껴 쓰던 연서는 세상의 창문을 모조리 닫아걸었지 어두움은 온몸을 덮쳐왔지만 손끝에 닿는 씨앗들 공중에서 떨어지는 빛으로 옷을 지어 입고 길 떠나던 백 년 전 어느 날 한 사람의 세월을 몰래 본다. © 김정기 2012.12.13

수박 / 김정기

수박 김정기 평온의 숲에 칼끝을 대니 붉은 도시에 흐르는 냇물은 맑고 깨끗하다. 내 책꽂이에 꽂힌 난해한 시같이 길을 못 찾아 내가 내는 도시계획대로 사각형을 만들고 그날 친정집에서 먹던 달콤함이 이 마을에 넘친다. 당신의 임지에서 듣던 나팔소리에 섞여 총성이 수박 안에 가득해 터져 나올 때 사방에서 갈증이 물소리를 낸다. 수박은 이미 지난 시간을 향해 구르고 굴러 닿을 수 없는 도시의 길목을 지키고 수박 씨 같은 글씨로 소설을 쓰던 큰오빠가 무겁던 젊음을 지고 걸어오고 있다. 내가 수박을 자르고 있는 이 밤에 세월은 물구나무를 서서 엉키고 있다. © 김정기 2012.06.28

6월 도시 / 김정기

6월 도시 김정기 지난 봄 꽃들의 주검 위에 비를 뿌리고 내 품에 스며든 젖은 꽃잎 친구의 숨결 속에 가서 안기는데 영산홍 송이마다 햇볕 한 장 눈부시다. 뜨거운 뇌우도 번쩍일 푸른 숲에 아직도 남아있는 혈기를 다스리며 앰뷸런스는 도시의 정수리를 관통하고 허리 꺾긴 달력 안에 숨는구나. 남은 날들의 은빛 어깨에 기대어 빈집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 듣는다. 윤기 도는 솔잎들이 숨 가쁜 정오 도시를 밝히고 정돈된 거리에서 후둑이는 빗방울 맞으면 유월은 물결이 된다. 세월이 된다. © 김정기 2011.06.09

|詩| 뜨거운 생선

나이 먹으면 먹을 수록 인격이 원만해지기는커녕 좋고 싫음이 점점 더 뚜렷해진다. 틈만 생기면 저를 놀리려 하시네요. 우리는 늘 과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 수록 새삼 해보고 싶은 일이 많이 있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짓 몇 개를 빼 놓고는 다른 일일랑 입 싹 씻고 눈도 주지 말아야지, 하며 마음을 다져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접시 위에 얌전하게 놓인 생선이 저는 평생 단 한 번도 피를 흘려본 적이 없다고 속삭인다. 과거를 피하지 마세요. 과거는 마음의 고향이랍니다. 비단결 망사 지느러미를 휘저으며 날렵하게 기어오르던 물결, 그 광범위한 물살에 씻기고 씻겨 삐죽삐죽 돋아난 가시가 당신의 혀를 찌르는 저녁에 나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부드러운 생선살에 레몬즙을 뿌린다. © 서 량 20..

발표된 詩 2021.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