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4

잃어버린 모자 / 김종란

잃어버린 모자 김종란 시계 태엽 뒤로 감은 듯 옛날의 시간 유난히 목청 좋은 휘파람새 휘파람 소리 찔레꽃 희디흰 꽃망울들 피어 있다 잃어버린 모자 시간의 저쪽에 놓여있는 모자를 집는다 짙은 그늘의 안쪽 희게 피어 있는 옛 이야기들 그 환한 빛 숨은 어둠 사이에서 손을 내민다 무릎 꿇고 이야기를 안는다 분침과 초침 사이에서 들리는 휘파람 소리 눈 맞추며 들여다 보는 상흔 사람이 피우는 꽃 내가 그렸던 너의 모습 그 곳에 피어 있다 사람 사는 이야기 만개한 짙은 숲속에서 조용한 귀 엷은 미소 가리던 모자를 집는다 © 김종란 2013.05.08

바람모자 / 김정기

바람모자 김정기 남빛 바람모자 쓰면 겨울하늘을 나를 수 있네 잔가지 쳐버린 우리 집 나무들 틈을 비집고 탱탱하게 부은 구름 떼 속으로 솟아올라서 끝내 사라질 것들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바람의 손을 잡겠네 만질 수 없는 모자챙에 꽃을 달고 비도 눈보라도 뙤약볕도 막아버리고 세상에서 도달하지 못한 나라에서 곤히 잠이 들겠네 바람에 몸을 매달고 먼 곳으로 떠나서 그 빛나는 우주의 맨살을 만나 얽히고 설킨 이야기 풀겠네. © 김정기 2010.11.30

가장 무거운 것 / 김종란

가장 무거운 것 김종란 지하 이층 숨긴 둥지에서 깨어난 새끼 비둘기들 천진난만한 울음소리는 아침잠 묻은 채 오르내리던 지하 삼층 에스컬레이터 잠시 멈춘다 빛과 속도를 비행하며 내려와 지친 비둘기 한 마리 지하에 두고 간 노래소리 물밀듯 승객 빠져나간 지하철 통로에 남아 빨간 잠바에 흰 모자 깔끔하게 쓴 중국여인 광활한 우주에 무중력으로 뜬 채로 아직도 쉬지 않고 혼자 대화하고 있다 운행을 멈춘 별똥별처럼 명멸한다 잉크냄새 풍기며 하루는 발행되었으니 생명의 뒷문 열어 젖혀 맞바람 치는 한 켠 그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낡은 이야기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일어나 빠르게 걷는다 무거워진다 폐기되는 길 위에 지어지는 집 숭숭 뚫린 꿈과 기억을 눈물로 메운 집 가볍고 아슬아슬한 집들의 골목을 되짚어 가는 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