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9

제5 계절 / 김정기

제5 계절 김정기 더 이상 내릴 수 없는 어두움의 겹겹에서 창백한 겨울이 떠나고 있다 봄이 오기 전 2월은 제5 계절이다 어떤 사람에게나 당도하는 창호지 물에 젖은 껍질들 탄력 없는 살갗이 매운 바람에 흐느적거린다 상 모서리 뽀얀 먼지 틈에 튕겨 떨어진 옛날 한 조각이 나팔을 분다 감추어진 부끄러움 하나 아직도 스며들어 품안에서 녹고 있다 독일에서 온 편지에 겨울을 견딘 제5 계절이 유럽의 축제란다 다음에 장미 주일, 퇴각하는 겨울의 마지막 비명이 들린다 이제 부활의 꽃들과 성처녀를 기다리는 햇살에 찔리며 날아가는 꽃잎들 우두커니 서서 바라본다 나도 날아오른다 진 남빛 나라를 향해 © 김정기 2011.02.12

진달래꽃 / 김정기

진달래 꽃 김정기 잠깐 잠든 사이 울타리에 진달래꽃 피었네 눈길을 피하려다가 들키고 만 꽃송이가 눈치를 보며 혼자서 귀뿌리를 붉히네 꽃잎들은 흩어진다 해도 남한강 노래를 흥얼거리며 안개 바다에 익사해도 오염된 대륙을 건너 바람도 거센 사막도 지나 당신의 뒷모습 따라 눈시울 적시며 새로 움트는 색깔로 고향 뒷산에 진달래로 태어나는 꿈을 꾼다네 봄의 무늬가 지워진다 해도 바람부는 계절의 틈새에 서서 꽃으로 지는 허공으로 걸어가리 © 김정기 2019.04.20

7월 / 김정기

7월 김정기 풀꽃들은 지금도 젊게 핀다 해는 더 이상 늘어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夏至의 뜨거움은 있었지 몸에서 불붙던 긴 낮은 꼬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밤이 조금씩 잡아당겨 덧난 빛깔들 고였는가 집집마다 작은 풀꽃 피어 잦아드는 빛을 밝히고 있다 7월을 건너가지 못하고 떠난 사람의 황홀이었나 하늘에 흐르는 강물 속 찍힌 발자국을 더듬는다 힘센 시간은 비켜가고 다시 산나리도 피어난다 꽃의 뼈가 굳어지면서 꽃 살에 물집이 생겨도 당신은 오늘을 화창하게 한다. 한낮의 적막이 젖어와 정갈한 단어만 물려주려고 땅에서 돋은 별을 주어 들고 계절의 가운데 몰려 있다 얼마큼 와 있는지 가늠 못해도 그 강에 가까이 서있다 한 다발 눈물도 흘려 보내면 그만인 발길도 뜸하다 가벼운 풍경을 몸속에 새기며 앳된 꽃잎 품에 품고..

여름 형용사 / 김정기

여름 형용사 김정기 여름 한낮에 움직이는 고요는 한마디 형용사다. 언제나 뒷그림자에 숨은 여린 얼굴도 그늘에 일렁이는 영화 장면이 된다. 멀리 있는 줄 알았던 팔월도 눈앞에 다가서니 벌써 나는 얼마큼 와 있는지. 아까워하던 아침저녁의 노을도 시름시름 가던 날도 정오의 뙤약볕에 뛰어간다. 진작 간수하지 못한 나날도 녹아 흐른다. 헐겁게 빠져나간 외로움까지도 찾을 수 없는 한낮 등을 보인 친구에게 여름을 주려고 손을 내민다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기에 더 환하고 더 부드러운 것이 없기에 맞바람 치는 창가에서 자판을 두드리며 바람에 실려 오는 풋내 여기서 모두 정지하기를 거둘 것이 아직 있으면 나누기를 지금 땅 밑에도 여름볕 밝게 드리워 주황색깔 나리 꽃잎 지는 여름 형용사 © 김정기 2015.07.19

지구의 꽃 / 김정기

지구의 꽃 김정기 세상의 꽃들이 울고 있다 피는 꽃마다 맺혀지는 눈물방울이 지구 위에 물이 된다. 빌딩 사이에 흰 꽃 터널을 이룬 배꽃 그늘에서 그는 혼자 서있다. 하늘에서 물줄기가 떨어진다는 놀라움이 난해한 직선을 그린다. 꽃에서 살 냄새가 난다 생살 썩는 내 아기의 비릿한 새 살 냄새가 난다. 돌계단위에 떨어져 있는 꽃잎들이 우주에서 돌아온 사람의 발목을 잡는다. 영원한 것을 위하여 버려야하는 꽃잎들이 땅 위에서 비를 맞으며 연주하는 멘델스존의 피아노 트리오 1번 D 마이너 지구는 쥐 죽은 듯. © 김정기 2011.04.28

꽃과 인터뷰 / 김정기

꽃과 인터뷰 김정기 내 몸에 꽃이 피다니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구나 시간에 앉은 흠집이 언제부터 싹터서 꽃이 되었고 소리칠 때마다 자라고 있었구나. 꽃잎, 한 겹씩 벗겨내서 말 걸어보자 이제 보니 너는 꽃이 아니었구나. 타관의 골목길을 돌고 돌아 나에게 안겨와 언제나 비로 다가와 눈물이 되었지 반짝이는 것들을 향해 들어설 때 새벽잠 깨어 뒤척일 때 찔러대던 가시가 꽃이 되다니 시만이 살길이라고 달려온 길 모퉁이에서 세상과 잡은 손을 놓고 말았지. 언제나 불씨를 갖은 꽃은 떠나가는 계절은 떠나 보내며 그래도 너는 모두 거두어들인 들판에 말없이 나에게 와서 어깨를 기대는구나. 꽃의 입김이 따스한 것도 이제 알겠구나. © 김정기 2010.12.06

보이지 않는 꽃 / 김정기

보이지 않는 꽃 김정기 돌아서면 보였네. 다가서면 져버리고 세상 넘어 외진 땅에 숨어서 피어 나에게만 보였네. 따스하게 꽃술에 볕이 들어 꽃잎에서 우러나오는 빛깔은 눈물 먹은 산색 같아 어둠에서라도 설레기만 하였네. 보이지 않아 여리게 더욱 어질게 고여 오는 봉오리 열리는 냄새 사방에 묻어나고 언제나 내 뒤에서 피고 지는 꽃 피는 얼굴과 지는 표정을 금방 알아차리는 나만 볼 수 있는 꽃 그대에게 보여주려 하면 보이지 않는 꽃 그러나 환한 상처가 되어. © 김정기 2009.11.23

|詩| 자목련의 첫외출

바람의 습도를 감지하는 자목련, 어깨를 움츠린다 어두운 붉은색 꽃잎 짙푸른 초록빛 품에 휘말려요 바람결 연신 흔들리는 자목련 당신은 도시의 불온한 습기를 한껏 들이마실 것이다 간간 크게 놀라기도 하고 낯선 사람들 말투를 흉내 낼 것이다 자목련의 첫 번째 외출 어두운 붉은색 꽃잎 짙푸른 초록빛 품으로 산산이 흩어지네 시작 노트: 2021년 봄 즈음해서 하루가 멀다하고 보고 또 보는 차고 옆 굴뚝 앞 자목련이다. 키가 내 두배 정도. 자목련의 엉성한 가지는 있는둥 마는둥 자목련이 가지채 세차게 흔들린다. 꽃의 흔들림은 순전히 바람 때문이다. 모든 꽃들이 그러하듯 자목련은 바람에 합세한다. © 서 량 2021.05.07

2022.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