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동의 규칙을 언급하면 묵묵무답. 그러나 피자를 화제로 삼으면 모두의 표정이 환해지는 금요일 오후 그룹 세션이다. 우리는 왜 규칙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피자라면 금세 기분이 좋아지는가.
피자 냄새와 맛이 연상되는 순간 후각과 미각이 합쳐져서 감각적 본능을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리처드가 묻는다. 한국인들도 피자를 좋아합니까. 토핑으로 무엇을 얹어 먹습니까.
‘pizza’는 ‘피쩌’라 발음하면 어쩐지 공격적으로 들린다. 경음을 피하고 ‘피자’, ‘자장면’이라 하면 맥없이 부드러운 기분이다. ‘noodle, 국수’, ‘chop suey, 잡채’ 같은 발음도 다분히 여성적이다.
납작한 빵을 뜻하는 히브리어 ‘pita’와 그리스어 ‘petta’는 ‘pizza’와 말뿌리가 같다. ‘피쩌’는 전인도유럽어의 쪼가리(bit) 또는 깨물다(bite)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그래서 ‘pizza’, 하면 은연중 공격적으로 들리는 게 아닐지 몰라.
병동규칙으로 화제를 되돌린다. 운전할 때 속도제한 규칙을 무시하면 어찌 되느냐. 교통사고가 일어납니다. 차선을 지키지 않고 깜박이도 켜지 않고 함부로 질주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샤워를 하고, 남의 방에 몰래 들어가지 말고, 기타등등 병동규칙, ‘rule’을 잘 지켜야 한다.
‘rule, 규칙’이라는 명사는 ‘regular, 규칙적인’이라는 형용사와 어원이 같다. 12세기경 고대불어로 질서, 그리고 라틴어에서 ‘straight stick, 곧은 막대기’라는 뜻의 명사로 쓰였다. 이 컨셉을 현대언어로 풀어 쓰면 ‘직설(直說)’에 해당한다.
‘rule’은 동사로 ‘규칙을 강요하다’라는 의미였고 15세기에 들어서서 남들을 지휘, 지배한다는 뜻으로 변천했다. 심포니 지휘자가 춤추듯 휘두르는 지휘봉도 곧은 막대기다. 오케스트라 멤버들이 연주하는 소리의 강약과 호흡을 통솔하는 센스가 있는 지휘자가 바람직하지. 이 비유는 음악 외에 일국의 정치에도 적용된다. 전 국민을 지휘하는 통치자의 고민(苦悶)이 느껴진다. 쓸 苦. 답답할 悶.
환자를 다루는 능력과 기술이 미흡한 직원들이 고민하는 광경을 곧잘 목격한다. 나를 위시하여 완벽한 병동직원이 되는 것은 완벽한 통치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환자도 직원도 하나같이 고생하는 나날이 겹치기도 한다.
고민 뿐만 아니라 고생(苦生)의 ‘고’ 또한 ‘쓸 苦’. 피자처럼 미각(味覺)적인 표현이다. 직역하면 ‘bitter life’인데 그런 말은 없고 ‘hard life’라는 관용어가 있다. 딱딱한 인생은 촉각(觸覺)의 차원이다. 우리는 인생을 맛보고 서구인들은 인생을 만진다는 차이점이 좀 재미있다. ‘재미’ 또한 자미(滋味)가 변한 미각적 발상이다.
한국 피자에 관심이 많은 ‘리차드’도 재미있는 이름이다. 원래 ‘Richard’는 ‘rich+hard’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였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rich’는 부유하다는 뜻 외에 강하다는 의미도 있다. 리차드는 세차고 딱딱하게 경직된 폭군처럼 강한 지배자라는 뜻으로 통했던 것이다.
‘Richard’의 애칭은 ‘Dick’. 소문자로 쓰면 일반명사가 되는데 ‘dick’은 음경이라는 품위 있는 말의 비속어로 쓰인다. 슬랭으로 ‘He is a dick’이라 하면 우리말로 ‘걔는 싸가지 없는 놈이야’라고 훌륭하게 번역할 수 있겠다. 어쩌다 참, ‘강력한 지배자’가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모욕적인 표현으로 변했는지, 어원학의 재미가 보통 재미가 아니다.
© 서 량 2024.06.08
뉴욕 중앙일보 2024년 6월 12일 서량의 고정 컬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24/06/11/society/opinion/202406111852346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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