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정치가가 노인네들을 폄하하는 발언을 해서 치열한 공방이 일어나고 있는 2023년 8월 한국이다. 폄하! 낮출 貶. 아래 下. ‘가치를 깎아내림’이라 사전은 풀이한다.
듣는 사람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에는 내용적인 이유가 있는가 하면 형식적인 이유도 있다. 겉으로는 예의를 갖춘 듯 들리지만 말의 내용이 안하무인일 수 있는 반면에 상대를 무시하는 말투, 이를테면 ‘반말’을 듣는 순간 불쾌해지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다. 하대(下待)를 받는 경우다.
‘반말 살인’이라는 말로 구글검색을 해 보라. 반말을 했다 해서 살인이 일어난 사례가 당신의 모니터에 우르르 떠오를 것이다. 2019년 8월에 한국을 경악시킨 ‘한강 몸통 시신 살인사건’도 반말에서 시작됐다는 위키백과 보고를 읽는다.
‘半말’은 문자 그대로 반만 하는 말이다. 더 정확하게는 미완성 문장이다. ‘아니요!’는 존댓말이고 ‘아니!’는 반말이다. 반말은 존댓말보다 짧다는 이유에서 말을 길게 하는 성의가 부족한 말투다.
단어를 송두리째 생략하는 우리말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이 좀 혼동스럽다. 한국어는 주어를 생략하는 관습이 있다. ‘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주어를 빼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면 공손, 그 자체다.
일인칭 뿐만 아니라 2인칭도 생략되기는 마찬가지. 우리는 ‘너 저녁 먹었니?’ 대신 ‘저녁 먹었니?’ 한다. 영어에서는 ‘I love you’ 할 때처럼 주격과 목적격의 인칭대명사가 빠짐없이 들어가지만 우리는 그냥 ‘사랑해’ 한다. 이토록 우리말은 생략법이 깔끔하다.
영어에도 사람을 제외시키는 생략법이 꽤 있다. ‘Ready?, 준비됐어?’, ‘Going home?, 집에 가니?’, ‘Sorry, 미안해!’, ‘Be right back, 금방 올게’, ‘See you later, 나중에 봐’, ‘Want some?, 좀 먹을래?’ 그러나 아뿔싸, 너무 생략하면 명령어로 돌변한다. ‘Speak! 말하라’, ‘Move! 움직여!’, ‘Shut up! 닥쳐!’
반말은 둘 사이의 친숙한 감정표현이기도 하겠지만 자칫 건방진 소통이기도 하다. ‘Familiarity breeds contempt, 친숙은 경멸의 근본’이라는 격언이 떠오른다. ‘오냐오냐 했더니 할아버지 무르팍에 똥싼다’는 우리 속담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말에서 ‘나’라는 주어를 싹 없애고 말하는 습관을 좀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결국 자기은닉(自己隱匿)이라는 비평을 받아도 크게 반박하지 못한다. 배경색상과 똑 같은 빛깔로 변신함으로써 포식자(捕食者, predator)의 눈에 띄지 않겠다는 자기방어법, ‘셀프 디펜스’에 해당하지 않나 싶다. 논리를 비약시키자면, 중국과 일본 사이에 찡겨 있는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와 두 나라에게 빈번히 침략을 당해 온 역사가 반영된 의식구조와 언어습관이 아닌가 한다.
영어 문법에서 생략법을 ‘ellipsis’라 부른다. 사전은 이 말은 또 ‘문장이나 사건을 의도적으로 생략해서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추측하게 만드는 기법’이라 풀이한다. 시(詩)에서도 자주 쓰인다. 그리고 ‘ellipsis, 생략법’는 ‘ellipse, 타원’와(과) 말의 뿌리가 같다. 말끝을 흐리면서 멈추는 것은 타원처럼 부드러운 수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직장 상관이 많이 늦게 출근한 직원에게 “자네 왜 늦었나?” 하고 물었더니, “무슨 일이 있어서…” 하며 얼버무린다면, 그것은 생략법인가 건방진 반말인가, 하고 나는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 서 량 2023.08.06
뉴욕 중앙일보 2023년 8월 9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23/08/08/society/opinion/202308081732594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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