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422. 붙기를 좋아하세요?

서 량 2022. 8. 25. 16:40

 

예나 지금이나 누구나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붙는 것이 큰 소망이다. 왼쪽 안 주머니에 납작한 엿 덩어리를 품고 입시장에 가던 기억이 난다. 끈적한 엿의 점성(粘性)으로 시험에 붙고 싶은 심정이었다.  

 

‘붙다’는 시험에 붙는 것 외에도 불이 붙다, 붙어 다니다, 이자가 붙다, 싸움이 붙다 등등 그 뜻이 매우 다채롭다. 당신과 나는 남에게 그럴 듯한 별명도 붙여주고 좋은 직장에 오래 붙어있기를 원한다. 붙는다는 것은 대개 좋은 일이다.

 

낯선 나라에 적응하는데 점점 속도가 붙으면서 타향에 정을 붙이고 사는 재미가 그런대로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마음에 든다. 문화적, 정서적 붙임성이 좋은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남달리 쉽게 정을 붙이는 과정이다.

 

남녀 간에 정이 붙으면 서로에게 애착심이 생기고 급기야 사랑이 싹트는 법이거늘. 비속어로 남녀가 붙었다는 말은 애정의 불이 붙어서 일어나는 애착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사랑 愛. 붙을 着. 이메일의 첨부파일 ‘attachment’의 본 뜻도 ‘애착’이다.

 

'attachment (애착, 愛着)'는 14세기에 라틴어와 고대 불어에서 '체포영장'이라는 뜻이었다 한다. 검찰이 발부하는 체포영장. 사랑의 저변과 검찰의 직분이 애착심에 뿌리를 같이하다니. 애착은 불교 12인연 법의 여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의 마일스톤인 觸, 受, 愛, 取, 有에 걸쳐 우리의 생성, 소멸, 환생의 고리를 엮는다. 만지고, 받아드리고, 사랑하고, 취하고, 유지하는 방식의 타고난 인간 본성으로.

 

‘붙다’는 뼈저리게 인간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빌붙거나 엉겨 붙거나 들러붙는 우리의 행동이 그렇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는 말은 소신이 불안정한 정치가의 행보에 대한 표현으로도 쓰인다. 아동 발육과정에서 발생하는 아기와 엄마 사이에 이루어지는 애착심의 결손에서 비롯된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입시 시험에 붙기 위하여 매 질문마다 정답을 맞춰야 한다. 스마트한 사람이 공식석상에서 매번 맞는 말을 해야 하듯이. 이때 ‘맞다’의 반대말은 ‘틀리다’다.

 

‘맞다’는 얻어맞는다는 뜻이 있어서 혼동스럽다. ‘맞다’의 반대말이 ‘때리다’가 된다. ‘맞은 놈은 펴고 자고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는 우리 속담에서 확연히 드러나듯이.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은 남을 때리지 못하고 맞기만 하는 사람이라는 뜻인지도 몰라.

 

시험에 붙지 못하고 떨어진 경우는 정답을 ‘때려 맞추지’ 못해서다. 무엇을 때려 맞춘다는 것은 다소 폭력적이다. ‘맞다’도 ‘붙다’처럼 어둡고 착잡한 면이 있다. 야단맞다, 퇴짜맞다, 바람맞다, 벼락맞다, 주사를 맞다, 총에 맞다, 등등. 심란하고 속상해지는 표현들.

 

'맞다'에는 좋은 뜻도 많다. 직장 파트너와 손발이 척척 맞을 때, 옷이 몸에 잘 맞을 때, 말의 앞뒤가 맞을 때, 어떤 예감이 용케 맞아떨어질 때,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맞았을 때. 또 있다. 남녀가 눈이 맞아 서로 좋아하다가 입을 맞출 때. 그들이 배가 맞았다고 누가 비속어로 악의 없는 말을 할 때.

 

TV 채널 서핑을 하던 중에 젊은 사내 둘이서 상대를 쓰러뜨리려는 스포츠 정신으로 서로를 두들겨 패고 때리는 장면을 본다. 한쪽이 힘이 딸려 수세에 몰린다. 그는 상대를 껴안는 순간 휴식을 취하려는 속셈이다. 몸이 자꾸 붙는다. 심판이 그들을 떼어 놓는다. 몸이 떨어지면 또 얻어맞고 휘청거린다. 나는 그에게 속삭인다. 붙어라, 이놈아. 떨어지면 죽는다!

 

© 서 량 2022.08.21

- 뉴욕 중앙일보 2022년 8월 24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22/08/23/society/opinion/20220823201439341.html

 

[잠망경] 붙기를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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