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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눈사람 여관" [이병률시집]에 대하여

서 량 2013. 10. 3. 02:46

눈사람 여관 [이병률시집]에 대하여

 

                              김정기

 

 

불가능한 슬픔을 쥐고 아낌없는 혼자가 되는 시간, 세상의 나머지가 세상의 모든 것이 되는 순간 혼자됨을 주저하지 않는 그다. 온전히 혼자가 되는 일은 자신을 확인하고 동시에 타인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기에. 타인에게서 오는 감정이란 지독한 그리움이고 슬픔이지만, 슬픔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 일이 곧 사람의 마음을 키우는 내면의 힘이 된다. 그러니까 이병률의 슬픔은, 힘이다. 불가능성 앞에서 그는 슬픔을 느끼지만, 그것을 쥐고, 그 힘으로 서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러니 마음의 마음이여/모든 세계는 열리는 쪽/그러나 모든 열쇠의 할 일은 입을 막는 쪽//모든 세계는 당신을 생각하는 쪽/모든 열쇠의 쓰임은 당신 허망한 손에 쥐여지는 쪽”―「불가능한 것들」). 

 

그가 잠시 머무르는 곳 ‘눈사람 여관’은 모두가 객체가 되는 공간이자 타인의 삶을 온몸으로 겪게 되는 슬픔의 처소이며 스스로 “세상의 나머지”가 되는 그곳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으로 돌입하여 다다른 이병률의 시 세계는 격렬한 감정의 파고 없이도, 무표정한 은유와 담담한 서사만으로도 가닿는 곳, 그에게도 혹은 우리에게도 익숙하고도 낯선 마음의 풍경이다.

 

혼자 /얼얼하게 버려진, 깊은 밤엔/누구나 완전히 하나/가볍고 여리어/할 말로 몸을 이루는 하나//오래 혼자일 것이므로/비로소 영원히 스며드는 하나 ―「혼자」 부분

 

왜 혼자여야 할까. 혼자가 내포하는 의미들은 여럿일 테지만 이 시집 속에서 이병률은 사소하다. 끊임없이 망설이고 결국엔 모르겠다 고백하는 시인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신의 모습을 감추지 않는 그 때문에 여기에는 깨달음으로써 초자아의 영역에 다가가는 단독자가 설 자리는 없다. 시인은 자신의 나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깊고 고요한 밤을 응시한다. 시는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인 시인의 몸을 통해 터져나온다. 시 안에서 그는 담담하게 세상의 구석지에 자신을 가져다 놓는다. (“시를 모른다 하더니 나조차 모르는 당신을 앞에 두고/ 많은 막걸리를 마시었다/ 내 얼굴을 가리기엔 막걸리 잔이 좋아서였다// 넘기려 했으나 쓴 찻물처럼 넘겨지지 않는 시간을 넘기고/ 혼자서 다시 찾은 밤 공원”―「시의 지도」). 여기에 애당초 성스러움 따위는 없다.

 

그러므로 이병률의 새 시집 『눈사람 여관』의 시들은 시가 시로 씌어지기 전 그 처음의 과정에 집중한다.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 슬프고, 아프며, 깨끗하고, 황홀하다. 그의 새롭지 않은 시 쓰기가 전혀 새로운 과정으로 탄생하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최초의 나무 한 그루가 우리 손발짓과/ 가리키는 곳을 관장한다고 합시다/ 손끝을 모은 한가로운 모든 것들을 흰색으로 칩시다// 근본이 벌어진 틈을 타/ 온전히 혼자인 스스로를 설득하고// 밥을 욱여넣는 것처럼 사랑할 때나/ 생각의 절반을 갈아 치우게 하는 달력의 일들/ 모두가 흰색이었다 합시다”―「흰」).

 

내 당신이 그런 것처럼

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

여관 앞에서

목격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느껴지는 건 그런 거지요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거짓을 생략하고

이별의 실패를 보러

나흘이면 되겠네요

영원을 압축하기에는 저 연한 달이 독신을 그만두기에는 ―「눈사람 여관」 부분

 

시인의 발걸음은 이제 여관으로 향한다. 이 순간 그와 동행하는 이는 쉽게 녹아 없어질 눈사람이다. 체온이 닿는 순간 녹아내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모순적인 존재인 눈사람은 어쩌면 시인 자신일 수도 있다. 시인은 알고 있다. 모든 인연은 사라질 것임을, 녹아 없어질 운명임을.  객관적 거리란 논리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돌이킬 수 없으려니/ 너무 많은 것을 몰라라 하고 온다// 그냥 사각의 방/ 하지만 네 각이어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제 마음에 따라 여섯 각이기도 한 방// 어느 이름 없는 별에 홀로 살러 들어가려는 것처럼/ 몰두하여/ 좀이 슬어야겠다는 것/ 그 또한 불멸의 습(習)인 것”―「침묵여관」). 그토록 허무한 자신과 맺는 계약은 사라짐을 예비한다. 이 눈사람과 함께 드는 여관에서 시인은, 사람은 누구나 혼자라는 인식을 재확인한다. 이것은 차갑도록 냉철한 인식이면서, 이렇다 할 세간이 없는 여관의 방바닥을 비추는 전구처럼 뜨겁고 명확한 인식이기도 하다.

 

이 시집의 발문에서 시인 유희경은 "이제 이병률 시인은 슬픔의 힘으로 아낌없는 혼자가 되기 위하여 어떤 것을 끌어안고, 그 너머의 소리를 듣는다. 너무도 사랑하여 그는, 많은 단어를 보듬어 안는다"고 해설을 썼다.

 

그러니 시인이 혼자가 되는 행위는 다시 말해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버리는 대신 그것 혹은 그와 멀어짐으로써 가까워진다는 관계의 역설이자 진리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시적 행위이고 또 시적 사유에 해당한다. 너무도 명확해 보이지만 부조리로 가득하고, 그럼에도 일말의 가능성을 버리지 못하는 내면의 세계, 어쩌면 시가 존재하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

 

시집 『눈사람 여관』에서 돌올하게 그려지는 시인의 생각과 태도는 분명 세련된 도자기나 투박한 질그릇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그것은 부드러운 무형의 선과 거친 감촉을 지닌 진흙에 가깝다. 적어도 『눈사람 여관』에 담긴 시들은 그러하다. 시인이 말한 것처럼, “그것을 세상의 나머지라 부르겠다”면 “세월이 나의 뺨을 후려치더라도 건달이며 전속 시인으로 남아 있을” 요량이라면, 그러한 시인의 각오는 이렇게 복기된다.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려 묻고도 싶은 겁니다/ 우리가 아프게 통과하고 있는 지금은 어디입니까”(「전부」).

 

모든 죽음은 이 생의 외로움과 결부돼 있고/ 그 죽음의 사실조차도 외로움이 지키는 것/ 그러니 아무리 빚이 많더라도 나는 세상의 나머지를 거슬러 받아야겠다// 그러니 한 얼굴이여, 그리고 한 세기의 얼굴이여/ 부디 서로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조금만 끌어안고 있자."(`세상의 나머지` 부분)

 

[시인의 말]

삶과 죄를 비벼 먹을 것이다.

세월이 나의 뺨을 후려치더라도

나는 건달이며 전속 시인으로 있을 것이다. 2013년 초가을 이병률

 

[뒤표지 시인의 산문]

아픈 데는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시집 맨 앞에 붙일 헌사에 대해 생각했다.

‘불[火]에게’라고 썼다가 지우고 ‘불(不)에게’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