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詩, 나는 이렇게 썼다: 장작불, 혹은 가오리연>
-- 「우리 詩」2010년 2월호 (178~182 쪽)
목 속에서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어요
목 속으로 봄바람이 연거푸 스며들어요
목 속 어디엔가에 내 유연한 유년기가
실개천처럼 흘러넘쳐요
오밤중에 겨울 숲 속을 헤매는
목이 짧은 동물 그림자가 아른거려요
나는 그 귀여운 동물의 정체를 알아냈어요
분명치는 않지만 아주 분명치는 않지만
불 기운이 트럼펫소리보다 더 귀에 따가워요
샛별 같은 갈망의 불씨가 탁탁 튀잖아요
오, 불길이 가오리연처럼 미친 가오리연처럼
차가운 하늘로 치솟고 있어요
나는 뒤늦은 깨달음의 허리띠를 조여 매고
푸짐한 털목도리로 목을 감쌉니다
함박눈이 공손히 내리는 3월초에 나는
아무래도 당신의 침범을 이겨낼 재간이 없어요
<목 속의 장작불> 전문
달포 전 3월 초에 아주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아직도 감기는 나에게 완전히 속 시원하게 작별을 고하지 않은 눈치다. 근 5년인가를 무탈하게 지내다가 아이구 이제 아주 큰 놈한테 걸렸구나 싶게 처음부터 으스스한 조짐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열도 나는 것 같으면서 목구멍에 바느질바늘이 열댓 개 들어가서 빠른 템포로 무대 춤을 추고 있는 듯 몹시 아프고 정신이 없었다. 기침을 하면 할 수록 목은 더 화끈거리고 처음에는 흡사 목 속에 참숯불이라도 새빨갛게 타오르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숯불이 품어내는 멀미 증세인 일산화탄소 중독을 제거한다는 신념으로 한겨울 차가운 방안을 덥히기 위하여 피워 둔 풍로 숯불에 할머니가 소금을 자꾸 뿌리시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내 목 속의 뜨거움이란 참숯불보다 훨씬 더 광폭하고 일자 무식하게 치솟는 장작불이라 표현해야 할 정도로 그렇게 참을 수 없이 뜨거웠다. 그것은 활활 타오르는 정열이었다.
나는 슬금슬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할 일이 태산 같은 마당에서 손에 전혀 일이 잡히지 않았다. 연신 마른 기침을 하던 나라는 생체는 결국 호흡기 장애에 시달리는 하나의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헐벗은 잡목 숲을 한바탕 뛰어다니다가 전신에 진땀이 질질 흐르는 이름 모를 조그만 짐승처럼 벌컥벌컥 겁을 내는 생명이었다.
졸지에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을 3악장을 듣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 한참을 뒤적여서 CD를 찾아낸다. 처음 부분의 철부지 유년기처럼 신바람이 나고 인생의 경이감에 사로잡히는 기쁨은 어느 듯 지나가고 난 후 잠시 멜로디가 처지는 기분이었다가 트럼펫은 모종의 회의심에 빠지는 기색을 감추면서 다시 끙! 하며 아랫배에 힘을 주며 아니야 나는 힘을 내야 돼! 하며 기운을 차리고 새로운 기백을 과시한다. 나는 화려한 트럼펫 독주를 들을 때마다 군대시절에 듣던 기상나팔이나 돌격나팔처럼 애수심과 공격심을 동시에 느끼는 습관이 있다. 트럼펫은 젊은이의 몸매처럼 늘 그렇게 비릿하고 비장한 냄새를 풍긴다.
목 속의 뜨거운 에너지는 이윽고 내 육체를 이탈하여 하늘로 치솟는다. 점잖고 여유 있는 양반집 자제 같은 방패연의 품위 따위는 눈곱만치도 없이 경거망동하는 가오리연을 나는 어릴 적에 가슴을 쿵쾅대면서 좋아했다. 긴 꼬리를 부산스럽게 흔들면서 전신을 비비 틀며 푸른 창공으로 돌진하는 위험천만한 행동을 일삼는 가오리연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가오리연은 내 의대생 시절에 현미경으로 화들짝 놀라 숨을 죽이고 처음 들여다 본 정충과 그 생김새와 윤곽이나 동작이 너무나 똑 같다. 그렇다. 내숭스럽고 게을러터진 방패연은 선천적으로 내가 타고난 체질이 아니다. 양반이 팔자걸음을 천천히 걷듯 어깨를 알맞게 좌우로 흔드는 그 위선적인 작태는 결코 직설적인 내 심성에 걸맞지 않은 것이다.
그날 오후는 겨울바람 같은 공기의 소용돌이가 있었고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눈은 땅바닥에 내리기가 무섭게 금세 봄의 도래를 꿈꾸고 있는 지구의 뜨거운 지열 때문에 쉬지 않고 녹아버렸다. 그래도 눈은 성실하고 공손하게 운명에 순종하는 태도로 꾸준히 내렸다. 아무리 내리고 내려도 땅을 하얗게 덮지 못하리라는 예측과 각오를 한 후 심호흡을 하면서 천상을 아쉽게 하직하고 내려오는 함박눈송이들이 무지막지하게 슬퍼 보였다.
칼리포니아와 정반대로 뉴욕의 날씨는 햇살이 선명하고 화창할 때보다는 구질구질하고 썰렁하고 답답하고 찬 바람이 잘 부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뉴요커들은 사시사철 양지 밝고 따스한 기후를 만끽하는 칼리포니아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성미가 급하고 거칠고 공격적이다. 타고난 기질도 중요하지만 환경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사오십 년 전에 재즈가 미국을 뒤흔들었을 당시에도 멜로디와 화음진행이 아름답고 간명한 서부의 재즈는 ‘쿨 재즈(cool jazz)’라 명명한 반면에 일견 시끄럽게만 들릴뿐더러 간명하기는커녕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다단한 동부, 특히 뉴욕에서 성행하던 재즈를 ‘핫 재즈(hot jazz)’라 불렀다. 쿨 재즈는 절제심 있게 엮여진 고전적인 시어(詩語)처럼 단아했고 핫 재즈는 요설적인 산문시의 작태를 닮았었다. 아름다운 멜로디나 아어(雅語)로 잘 버무리 된 음악과 시를 마다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러나 삶과 일상이 늘 그렇게 아름답고 고운 생각과 말로만 점철된다는 사고방식은 또 얼마나 철딱서니 없고 위선적인 정신상태인가.
그날은 그런 느낌이 참으로 심했다. 밖의 날씨는 음산의 극을 달리고 함박눈은 제철을 잘 못 만나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오는 훌륭한 품격으로 세인의 찬사를 받기는 일찌감치 글렀다며 뜨겁게 절망하고 있었다.
이쯤 해서 내 목의 열기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가오리연처럼 허허한 시공을 활개치다가 급기야는 아뿔싸 두 번쯤 창공에 동그라미를 그린 후 땅으로 머리를 처박고 뇌진탕이라도 일으키려는 위기감각에 빠진다.
그날 내 정서는 참으로 저열했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쓰게 된 것이다.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 처절한 심사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더 이상 요염한 꽃과 부드러운 낙엽의 몸짓에 대하여 낭랑한 목소리와 총기(聰氣) 있는 눈빛으로 시를 읊조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꼴불견으로 목 감기에 걸린 내 처량한 건강상태에 대한 넋두리는 더더구나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시란 동정심을 능가해야 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않기로 한다.
일상에서 채집한 정서를 시로 옮기고 싶은 욕심이나 습관은 솔직해 말해서 허망하고 터무니 없는 노릇이다. 특히 나는 거대한 담론이나 심각한 인생의 깨달음이나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아직 내게 제대로 일깨워 주지 못한 가장 골치 아픈 지적(知的) 활동, 즉 ‘존재론적인 탐색’이 엿보이는 듯한 시라면 속이 울렁울렁할 정도로 심한 열등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능력과 재주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주와 인생의 진리와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야심만만하고 거창한 글이란 예술작품이라기 보다는 신문 하단에 실리는 껄렁한 성명서, 혹은 전문서적에 게재된 난해한 논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식으로 간주하는 좀 시건방진 태도로 평생을 살아온 이유도 있다.
모든 시인들은 그들의 테두리 안에 존재하고 사고하고 시작(詩作)을 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인간은 자기 인식의 테두리를 뛰어 넘지 못한다’ 하는 칸트의 말이 백 번 맞는 말이다. 나의 테두리는 도무지 어떤 테두리일까 가는 궁금한 생각이 자꾸 든다. 나는 중고등학교 문예반 시절부터 지금껏 얼마나 오랜 세월을 시인들의 가장 보편적인 영역인 그리움 혹은 연애감정에 안주해 왔었던가. 그리움은 무엇이며 우리가 울며 불며 신세타령과 넋두리를 일삼는 사랑이란 과연 무엇이라는 말인가. 나와 당신은 손오공의 이마를 옥조이던 머리띠, 삼장법사의 몇 마디 주문이 던지는 법식(法式)에 쩔쩔매던 테두리의 억압에 감금된 그토록 무식하게 마음 편한 종신수(終身囚)인 손오공의 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바이러스나 테러리즘의 외부세력의 침범을 이겨낼 요량이 전혀 없는 가여운 짐승들이랄까.
왜 유관순은 옛날에 옥 속에서 만세를 불렀던가. 왜 내 목 속에서는 아직도 장작불이 지글지글 타고 있는가. 왜 봄은 이렇게 나와 당신을 가차없이 세차게 덮치는가.
© 서 량 2009.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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