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 3

현기증 / 김정기

현기증 김정기 눈을 감으면 보입니다. 이별이 아깝던 날 청춘의 눈물이 눈을 뜨면 안개 망에 걸려온 저녁 빛 숨지는 햇살에 당신이 가고 다시 오는 질긴 동아줄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산들이 기우뚱하고 흔들릴 때 부서지는 뿌리에 매달린 나무들의 애달픈 사랑 때로는 속을 드러내서 빛나는 최후를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풋풋했던 기억의 방에 들어가 드디어 당신을 놓아 주었지요 만지면 모두 하늘이 되는 땅 위의 형체도 이제 놓아버립니다. 막막한 길을 걷는 맑은 피가 균형 잃은 몸을 그래도 받혀 줍니다. 아득해서 더욱 가까운 시간의 눈빛을 마주보며 이 자리가 황홀합니다. 나는 완벽한 흰빛이 되어있습니다. 11월30일 © 김정기 2013.12.02

|詩| 대담한 발상

영화에서는 남자들이 얼토당토아니하게 공격적이잖아요 그래서 재미있잖아요 답답하고 후줄근한 역경이 다 지나가고 평온한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야 당신은 죽음이 두려워서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남자들에게 질깃한 연정을 느꼈잖아요 종려나무 잎새를 포근히 감싸주는 하늘을 올려보는 순간이 딱 그랬어요 코리언 에어라인 창문 밖 구름 밑에 깔린 발 아래 뉴욕의 야경이 또 그랬고요 그건 손을 내쳐 뻗쳐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당신이 허기진 시선을 보내면 응당 들이닥치는 아찔한 현기증이었어요 더 이상 참지 못했던 게 화근이었어 혹한의 추위가 내 거실을 뻔뻔스레 침범한 토요일이었나 싶은데 혹시 당신이 손에 땀을 쥐고 관람한 전쟁영화였는지 온통 땀으로 번질번질한 얼굴의 남자들이 막무가내로 뛰어다니는 전쟁터에서 터지는 일 같은 ..

2021.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