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당동 2

|詩| 화려한 가을

바람결 물결치는 호숫가 머리칼 풀어헤친 갈대들이 서걱거린다 샛노란 금발 또는 갈색 머리 내 어릴 적 앞마당 장독대보다 더 높은 음정 하왕십리 지나 행당동 무학여자고등학교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 다음 소절을 예고하는 트롬본 주법으로 낮게 터지는 당신의 탄성 지구의 예민한 음감, 바람이 몸을 푼다 천천히 잠시라도 좋아, 잠시라도 좋다며 우주 속 깊이 자리잡은 무한한 가을을 나는 줄기차게 탐미한다 시작 노트: 가을에는 바다를 멀리한다. 갈대밭을 훑어가는 바람. 잔물결 일렁이는 호수. 행당동 변전소 앞을 지나 전차 역으로 가는 행길에서 무학여자고등학교 아이들 떠드는 소리 들린다. 금관 4중주 연주가 그치지 않는다. © 서 량 2022.10.11

2022.10.11

|詩| 겨울 음악

하늘이 우중중한 회색 빛으로 내 머리를 짓누르는 겨울 아침에 베토벤 열정 소나타 3악장을 듣는다 국도 87번이 뉴욕 남북으로 줄기차게 뻗은 하이웨이가 나를 관통한다 겨울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내가 열 살을 갓 넘어 앞마당 장독대 새파란 하늘 반들반들 비치던 간장 항아리 그 칠흑 같은 굴절의 삐딱한 각도가 하여튼 지금도 좋아라 가녀린 민들레 꽃줄기 여고생 당신 야들야들한 허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칠까 말까 고추장 고드름 아프게 뾰족하게 맴맴 내가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뉴욕 하늘 완벽한 회색 빛 이게 내 유년기 하왕십리 지나 행당동 겨울이라면 눈비 질금질금 쏟아지다가 돌 축대 쿵 무너져 내리던 행당동 언덕길이라면 여기가 ©서 량 2003.02.03 - 2008.11.09

2008.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