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 4

백 년 전 / 김정기

100년 전 김정기 100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을 삭이기에 충분한 고요인가 이 건물에 가득하던 풋풋함 모두 어디로 갔을까 헤픈 웃음도 문안에서 졸아들고 여자의 허리에 매달리던 굵은 목소리 공중분해 되고 바람도 서로 껴안던 진주 목거리 풀어져 흩어져서 떨고 있다. 나뭇잎이 내려앉은 스카프에 낡은 실밥 하나 방에 성에 끼던 견뎌내기 어려운 추위 연필로 베껴 쓰던 연서는 세상의 창문을 모조리 닫아걸었지 어두움은 온몸을 덮쳐왔지만 손끝에 닿는 씨앗들 공중에서 떨어지는 빛으로 옷을 지어 입고 길 떠나던 백 년 전 어느 날 한 사람의 세월을 몰래 본다. © 김정기 2012.12.13

사람의 마을 / 김정기

사람의 마을 김정기 사람의 마을에 다녀가는 건 여름 숱한 넝쿨들이 손을 뻗어 야채 가게에서 잘 익은 과일들은 한 사람의 발자국을 응원하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말이 나지 않는 평생은 끝내 물고 늘어져 세상 끝까지 데리고 간다 여름의 한복판에 비가 내리면 더욱 싱싱해지는 강아지풀 벼 포기 사이를 뛰노는 메뚜기들도 사람냄새가 그리워 알을 깐다 사람은 나를 끌고 여름의 끝으로 가지만 찌르레기 소리에도 놀라워하는 나는 끝내 여물지 못한다 여름은 지구 속 속을 녹일 줄 알지만 그대 입안에 숨죽인 말 한 마디를 녹이지 못한다 여름이 빠져나가는 길목에서 사람들은 벌써 추위를 타며 마을을 떠나 웅크리고 달력을 본다. © 김정기 2011.07.30

|詩| 대담한 발상

영화에서는 남자들이 얼토당토아니하게 공격적이잖아요 그래서 재미있잖아요 답답하고 후줄근한 역경이 다 지나가고 평온한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야 당신은 죽음이 두려워서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남자들에게 질깃한 연정을 느꼈잖아요 종려나무 잎새를 포근히 감싸주는 하늘을 올려보는 순간이 딱 그랬어요 코리언 에어라인 창문 밖 구름 밑에 깔린 발 아래 뉴욕의 야경이 또 그랬고요 그건 손을 내쳐 뻗쳐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당신이 허기진 시선을 보내면 응당 들이닥치는 아찔한 현기증이었어요 더 이상 참지 못했던 게 화근이었어 혹한의 추위가 내 거실을 뻔뻔스레 침범한 토요일이었나 싶은데 혹시 당신이 손에 땀을 쥐고 관람한 전쟁영화였는지 온통 땀으로 번질번질한 얼굴의 남자들이 막무가내로 뛰어다니는 전쟁터에서 터지는 일 같은 ..

2021.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