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5

숲 / 김정기

숲 김정기 숲은 새벽의 기미로 달콤하다 술렁이며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어울려 여름을 만든다. 쓰르라미가 자지러지는 청춘의 손짓을 그때 그 순간을 잡지 못한 숲은 기우뚱거린다. 감춘 것 없이 다 들어낸 알몸으로 땡볕에 땀 흘리며 서있는 나무들에게서 만져지는 슬픔 절단해버린 발자국을 수 없이 되살리며 그들의 반짝임에 덩달아 뜨거움을 비벼 넣는다. 올해 팔월도 속절없이 심한 추위를 타는데 매일 시간은 새것 아닌가. 내 안에 충동은 오늘도 못 가본 곳을 살피지 않는가. 뒤 돌아보며 챙기지 못한 것 숨결 안에 가두고 오랜 비바람에 시달린 나무들의 얼굴은 상쾌하고 환하다 그들의 표정은 언제 보아도 편하다 더구나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웨스트체스터*의 여름 숲은. *뉴욕 북부 © 김정기 2010.08.08

겨울 담쟁이 / 김정기

겨울 담쟁이 김정기 땅을 박차고 시퍼렇게 얼어서 허공을 기어오른다. 잎 위에 눈이 쌓여도 녹을 때까지 답이 없다. 끝없는 질문의 문설주에서 속으로 뻗는 줄기를 억누르며 들키지 않게 속살을 키운다. 어둠이 그의 길을 막아도 태양을 만들어내는 몸짓으로 눈물도 없이 하루를 닫는다. 실핏줄에 동상이 걸려 얇은 살이 멍들어 번져가도 과묵하던 아버지의 품성 가지고 올라가고 오르고 또 오를 뿐이다. 작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혼자서 힘을 얻는 그는 숨결을 품고 창공에 집을 짓는다. 왕궁에 기왓장도 어루만지고 그보다는 빛나는 봄을 잡으려고. © 김정기 2010.01.12

|詩| 봄비의 반란

봄비의 숨결이 거칠다 조그만 사각형을 클릭하면 쐐기 모양의 체크마크가 고개를 치켜드는 내 컴퓨터 모니터에 봄비가 줄줄 내린다 봄비가 아프다 봄비는 순순히 자연의 법칙을 따를 뿐 당신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렇지 않다고 속삭인다 소프트웨어를 받아드리는 기본방침에 동의하는 봄밤에 봄비의 숨결이 깊어진다 봄비의 잔물결이 참 좋아요 봄비의 어깨가 체크마크 모양으로 한쪽으로 치우치다가 불현듯 치솟는다 나를 한사코 거부하듯 봄비가 지붕을 탕탕 때리는 봄밤이면 © 서 량 2020.02.29

2020.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