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살 2

가을 맨해튼 / 김정기

가을 맨해튼 김정기 골목들은 엎드려 있었네, 숨죽인 그대 따라 떠나가는 것에 익숙해진 오늘은 이방인의 굽은 등 어루만지며 흔들리는 타향도 마지막 발길에 떠내려가고 플라자 호텔 녹 쓴 지붕에 묻었던 가을 햇살 이제는 눈물 없이, 쓰라림도 없이 올려다보았네. 고개 숙인 잎도 얼굴을 들던 날 빛나는 슬픔이 몰려와 한 솔기 바람을 만들었네. 그대의 침묵이 6 애비뉴를 녹이고 깨어진 가을 달을 다시 띄우고 강물을 끓이고 백만 개 태양을 잉태하는 불씨로 살아나고 살아나서 불을 피우네 땅거미가 덥힌 도시의 속살을 헤집고 쇼윈도 안에 펄럭이는 옷깃 조용히 전등이 켜지네 © 김정기 2015.11.18

고추냉이 / 김정기

고추냉이 김정기 아궁이 불을 끄고 들길로 나섰다 민들레는 피가 굳어 거친 숨을 내쉬고 강아지풀도 바람에 시달려 소리지른다 한풀 꺾인 가을 풀 섶에서 보랏빛 꽃 한 송이 엷어가는 햇살에 몸 적신다 매운 맛을 키우려 숨어있는 고추냉이 속으로 숨을 고르며 독을 키운다. 감추어둔 말을 쏟으며 날파리가 기어간다 기다리는 것도 지친 발걸음에 부서지는 가을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당신은 어디에도 없구나 버려진 풀끼리 쓰다듬는 틈새에 보이는 것이 있다 빛 알갱이들이 무리 지어 태어나는 고추냉이 속살. 다시 불을 지피고 매운 맛에 떤다. © 김정기 2010.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