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2

파뿌리 / 김정기

파뿌리 김정기 부엌은 흔들렸고 어지러웠다 이제는 맛을 내고 약재로 쓰인다는 향기도 모양새도 없는 파뿌리를 손질하다가 문득 버린 친구의 목소리를 듣는다 손에 잡힌 바다는 얼어 터지고 뜨거울수록 식어가는 여름체온은 날마다 늘어나는 실금이 나의 물독을 깨려고 굵어져만 가고 들키지 않게 지우고 지운다 발을 헛디뎌 떨어진 낭떠러지에서 수많은 뿌리에 매달려 숨을 쉰다 너무 일찍 익혀버린 당신의 얼굴은 온통 세상 가득 돋아나 잊으려 해도 더 또렷한 물방울인 것을 빈 이웃집 벨을 누르며 온기를 거두는 마을에서 발길에 채여 나간 산더미 같은 뿌리들을 한 가닥 씩 씻어서 눕히는 손이 떨린다 돌아올 시간을 장담하며 떠나는 사람들 틈에 뼈들은 더 크게 소리 지르고 검은 머리는 하얗게 세어가고 멀어져간 시간들이 아우성치며 달려..

|컬럼| 384. 비겁한 처방

입원환자 약의 복용량을 놓고 다른 정신과의사와 회의석상에서 토론이 벌어진다. 의사들의 처방습관에도 어쩔 수 없이 각자각자의 성격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토론이 논쟁으로 변한다. 약의 효능보다 부작용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변론이 나온다. 어차피 아무리 약을 써도 증상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 것이 ‘정신분열증’이니까 아예 미리부터 약의 부작용이나 방지하자는 속셈이 내보인다. 적극적으로 병의 증세를 호전시키는 약물투여는 관심 밖이다. 나는 2010년부터 한국에서 통용되는 ‘조현증’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못하다. 사람 뇌의 신경구조가 현악기가 아닌 이상 조현(調絃)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올들어 어느덧 46년째 정신과의사로 일하고 있지만 정신분열증이 뇌질환이라는 단정을 내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환자의 두뇌장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