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3

물의 이력서 / 김정기

물의 이력서 김정기 아무리 보아도 닳지 않는다. 달력도 없는 흰 벽과 반듯한 복도 이해할 수 없는 간판을 읽으며 헤맨다. 내가 물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고 꺼내지지 않는 젊음을 안으로부터 끌어올린다. 그 흰 벽에서 물이 흐르고 보이지 않는 손들이 나와서 확대경으로 살핀다. 오래전 산수유 꽃에 이슬로 내려와 가슴이 빨간 새의 지저귐에 흘러 살 개천 돌 틈 사이에 몸을 적시고 금강의 상류로 동해바다로 떠다니다가 대서양 구름떼에 섞여버렸다. 웨스트체스터 상공에 서 소나기로 내려 잃어버린 진찰실에서 맑은 유리잔에 부어진다. 그동안 내가 맑게 스미는 한 방울의 물이었음이. © 김정기 2012.03.31

봄날 / 김정기

봄날 김정기 보이지 않는 물이 흘러간다. 몸 안에서 피어나는 안개가 가냘픈 실핏줄을 건드린다. 어두움은 가끔 힘줄을 만들어 어디까지 흘러 마지막 길을 트일 것인가. 어느 봄날 묻어두었던 사랑이 큰소리 내며 다가오는 황홀함. 갑자기 눈부신 세상과 아득한 것이 이루는 합창 내가 가는 길목에 우두커니 서 있는 봄 산수유가 주렁주렁 꽃밥을 터뜨리고 대책 없이 그늘 지우는 밑으로 그립다는 언어에는 눈을 돌리던 넝쿨들이 기어 올라오고 있다. 어디를 가나 당신의 흙이 묻어나는 터에 이 알뜰한 봄을 써 버리고 있다니 꽃송이 하나하나에 말 걸어보면 답장 없는 연서에 달콤한 말들을 내 이마에 쏟아 붇는다. 가는 봄날 한 자락을 붙잡고. © 김정기 2011.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