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 2

뚜껑 / 김정기

뚜껑 김정기 우리가 숨겨 두었던 가락을 풀어 모아 병에 가두고 뚜껑을 닫았네 빛은 빛 대로 노래도 병에 갇히어 꼼짝하지 않았네 뚜껑을 닫고 가끔 향기는 향기대로 맛은 맛 대로 포장되어 잠깐 씩 열어 즐겼지 어느 날 오른손은 무엇이던 한다고 설쳐 댔지만 뚜껑은 도사리고 침묵하고 책장도 붙은 대로 왼손이 쉬는 동안 집안에 뚜껑은 끝없이 줄 서고 넘겨야 할 책장은 수북했네 열린 것들은 정도를 벗어난 모습으로 시들어가고 이제라도 황급히 뚜껑을 닫으나 이미 때는 늦었네 간직한 사랑은 공기에 약하고 이별은 되돌리기 어려워 시나브로 멀어져 갔네 변질된 크림을 얼굴에 바르고 뚜껑이 열린 세상을 향해 어진 미소를 지어보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나를 찌르려 했네 그러나 눈부신 빛 아래 선연히 들어낸 안으로 조인 단단한 뚜껑은..

|詩| 지독한 에코

뚜껑을 덜거덕 열고 장독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면 고개를 푹 박고 들여다보면 내 사랑을 둥그렇게 구획하는 경계 안의 컴컴한 내막이 아우성치는 무시무시한 에코가 얼굴을 때린다 정신이 얼얼해지고 기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금방 지나간 듯 귀가 멍멍해지는 에코! 지구가 암흑 속에서 꿈틀대는 격렬한 동작 값싼 교훈 같은 거를 들먹이는 고대소설의 권선징악 마음 착한 남녀가 막판까지 살아 남는 사연 그리고 또 있다 시인들은 너 나 다 아름답다는 망상 등등 하여튼 간에 빈 항아리 속에서 아! 하는 지독한 에코 때문에 지성이고 쥐뿔이고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아늑한 이기심이 솟는다 아무 것도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며 항아리에 곰곰이 귀를 기울이다가 © 서 량 2005.12.28 2006년 12월호에 게재 시작 노트..

발표된 詩 2022.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