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 김정기 우리가 숨겨 두었던 가락을 풀어 모아 병에 가두고 뚜껑을 닫았네 빛은 빛 대로 노래도 병에 갇히어 꼼짝하지 않았네 뚜껑을 닫고 가끔 향기는 향기대로 맛은 맛 대로 포장되어 잠깐 씩 열어 즐겼지 어느 날 오른손은 무엇이던 한다고 설쳐 댔지만 뚜껑은 도사리고 침묵하고 책장도 붙은 대로 왼손이 쉬는 동안 집안에 뚜껑은 끝없이 줄 서고 넘겨야 할 책장은 수북했네 열린 것들은 정도를 벗어난 모습으로 시들어가고 이제라도 황급히 뚜껑을 닫으나 이미 때는 늦었네 간직한 사랑은 공기에 약하고 이별은 되돌리기 어려워 시나브로 멀어져 갔네 변질된 크림을 얼굴에 바르고 뚜껑이 열린 세상을 향해 어진 미소를 지어보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나를 찌르려 했네 그러나 눈부신 빛 아래 선연히 들어낸 안으로 조인 단단한 뚜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