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4

우유 따르는 여자 / 김정기

우유 따르는 여자 김정기 아직도 여자는 우유를 따르고 있다. 삼백 년도 넘게 따른 우유는 넘치고 넘쳐서 어디로 해서 어느 강으로 몸을 섞었을까. 왼쪽 창문을 통해 들어온 태양은 여자의 왼쪽 팔에서 튀고 짙은 남색 앞치마에 안긴다. 그리고 머릿수건 뒤에 가서 빛으로 조용히 머문다. 허름한 부엌 벽 위에 걸린 바구니 속에 담긴 곡식은 아마 지금쯤 싹이 나서 셀 수 없는 낱알을 만들었겠지 그러나 보았다, 식탁보 밑에 깔린 두꺼운 어두움 알 수 없는 그 나라의 냄새가 풍겨온다. 베르미어*는 신들린 붓으로 고요를 만들고 순하게 네모 반듯한 감옥에 서서 끝없이 우유를 따르고 있다 그 소리가 지금 나의 잔에도 스민다. 윗저고리의 황홀한 겨자 빛깔이 나부껴온다. 썩지 않는 빵들이 식탁 위에서 계속 발효되고 있다. *1..

무거운 깃털 / 김정기

무거운 깃털 김정기 남들이 다 달고 나르는 깃털이 물에 젖지도 않았는데 무겁고 아프다. 다시는 잠들지 못할 것 같이 날밤을 새면서 걸맞지 않는 노래, 비도 아니고 소녀시대도 아닌 김범수. 임재범 폭포에 맞아 주검이 된 0시의 햇살이 황홀하다. 도처에 흩어진 통증을 모아서 버려주는 당신의 손길 감옥에서라도 돌아와서 얼마나 고생했느냐고 물어 주길 바라며 기다린다. 형량이 얼마이기에 경축특사도 없단 말인가 아무리 불러도 뜨거운 명칭 사랑이여. 그래도 신선한 그림자 솔잎 사이 햇살 한 올도 아까운 나이에 모두가 손 흔들고 떠나버린 낯익은 밤거리에서 몸 안에 깃털을 하루 종일 뜯어말린다. 새벽이 오도록 보푸라기 깃털은 쌓여가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땅 위에 나는 없다. © 김정기 2012.03.01

|컬럼| 306. 누가 누구를 속이나?

'hallucinate (환각을 일으키다, 환각에 빠지다)'는 17세기 중반쯤 통용되던 라틴어로서 마음과 생각이 오락가락하고 횡설수설하는 말투를 뜻했다. 'hallucinate'는 그보다 반백 년 앞선 17세기 초에 고대영어에서 속인다는 말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쓰이지 않는 용법이지만 마치 공룡의 화석처럼 말 속 깊은 곳에 우람한 뼈대가 묻혀있다. 15세기경 라틴어에 등장한 'delude (착각하다, 망상에 빠지다)' 또한 처음에는 속인다는 뜻이었다. 환각도 착각도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참한 결론이 나온다. 환각이나 착각의 속임수에 대한 질문이 터진다. 속이다니! 누가 누구를 속인다는 말인가. 지금껏 나는 내 환자들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례를 무수히 보아왔다. 환청에 시달리고 망상증에 빠진 환자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