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된 詩

|詩| 꽃에 관한 최근 소식

서 량 2022. 3. 11. 20:40

 

눈에 불을 켜고 당신이
꽃을 면밀히 조사하는 동안
꽃 내장이 뭉그러지고
꽃 뼈가 으깨지고
꽃은 무색 무취의 기체가 된다

꽃은 항상 이름 없는 동작이다
당신이 한 송이의 꽃을 알려 할 때
당신이 한 송이의 꽃이 되려 할 때
꽃의 근엄한 칭호가 당신을 방해한다
우리는 묵묵한 꽃말 골갱이를 씹어 삼키고
너덜너덜한 말(言) 껍데기를 뱉어낸다
꽃말을 먹을 때마다 꽃이 되는 우리들
꽃보다 더 새빨간 몸짓으로
으스스 진저리를 치는 우리들

꽃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작이다

 

© 서 량 2004.03.04

<시문학> 2004년 5월호에 게재

 

『시문학』2004년 6월호에서 (페이지 177-182)
이달의 문제작: <감성 안에서, 감성을 넘어 – 2> 중에서
-- 안수환
(시인)

 

 의미의 해체. 시적 진실의 존재론적인 자기파괴. 시는 ‘의미’가 아닌 ‘사건’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언어체계의 기의망을 벗어난 시인의 발화. 서량의 시세계가 보여 주는 것: ‘꽃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작이다’. 그렇다. 의미의 대칭은 의미의 ‘상실’이 아닌, 의미의 ‘극복’이며, 그런 점에서 시인은 자신의 명상이 깊으면 깊을수록 깨끗한 침묵을 통해 언어의 허물을 벗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 때의 침묵을 우리는 ‘절대 의미’, 즉 ‘절대 공간’이라고 달리 불러보기로 하자. 절대 공간에서 (그것을 ‘1’로 볼 때) 어떤 요소를 빼버리면 이곳에 남는 부분은 어떤 요소의 대칭 (1-a=a’)이 있게 된다. 즉, 다른 의미가 발생한다. 어떤 요소 (a)와는 또 다른 요소 (a’)의 출현(1-a=a’). 의미와 의미의 대칭, 그것이 의미의 한계인 것이다. 의미는 아무러하고 아무러해도 좋다. 시적 감응의 진동은 결코 의미의 표상에선 오는 법이 없다. 그것은 시인의 발화를 통한 사물 (이 작품의 경우에는 ‘꽃’)과의 접촉, 즉 ‘발화-청취’의 역학적인 관계로부터 온다. 의미에 갇힐 수 없는 까닭. 시는, 그러므로 낱말의 의미가 해체된 뒤 도둑처럼 찾아오는 문맥을 붙들고 속삭인다. ‘말의 껍데기’(의미)가 아닌 말의 살점(사건)을 붙들고 몸을 떤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었던 것.

 

시작 노트:
18년 전에 쓴 시.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책임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 생각과 느낌이 변해서 그런 게 아니다. 사람은 특히 시인들은 대체로 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잘난척 지꺼리거나 고운척 속삭인다. 이 시는 시라기보다 하나의 논문이거나 성명서 같은 느낌이 든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은 알고 있다. 이것이 성명서가 아니라는 것쯤은. "의미는 아무러하고 아무러해도 좋다," 라고 말하는 안수환 시인의 의중을. 2022.03.12